[박한나의 배터리ON] ‘아이스 스톰’이 삼킨 미국…정전 공포 속 ‘배터리 방주’

박한나 2026. 2. 3.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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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가 그린 일러스트.


[편집자주] ‘박한나의 배터리ON’은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배터리 분야의 질문을 대신 해드리는 코너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을 비롯해 배터리 밸류체인에 걸쳐 있는 다양한 궁금증을 물어보고 낱낱이 전달하고자 합니다.

북미 대륙은 올해 1월 ‘아이스 폭풍’(Ice Storm)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역습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텍사스에서 남부·중남부의 미시시피주와 테네시주를 지나 북동부 뉴잉글랜드까지 약 2000마일에 걸쳐 한파와 폭설이 강타하며 22개 주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여전히 일부 지역은 이동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교통사고와 저체온증 등으로 최소 85명의 사망자도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최소 100만 가구 이상이 정전 피해를 겪으며 미국 전력망도 맥없이 끊어졌습니다.

난방과 조명마저 끊긴 암흑 속에서 고립된 미국의 지역 주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집 마당에 세워진 전기차에서 유일한 희망을 찾았습니다. 전기가 끊기면 쓸 수 없을 것 같던 전기차가 오히려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가장 쓸모 있었다는 것입니다.

98kWh급 배터리 정전시 수일 전력 공급…“V2L 기능 더 알려져야”


노후화된 미국의 전력망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얼음 가지에 끊겨 나갈 때 재난의 풍경을 바꾼 것은 전기차의 ‘전력 외부 공급’(V2L) 기술이었습니다. V2L은 전기차에 탑재된 대용량 배터리의 전력을 외부로 공급하는 기술로, 통상 3.6kW의 출력은 정전 시 가전제품과 조명 등에 수일간 전력을 공급합니다.

이 같은 사례는 영어권 커뮤니티인 레딧과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잇따라 공유됐습니다. 포드 F-150 라이트닝과 기아 EV9에 탑재된 SK온 배터리를 활용해 정전 상황에서도 가정용 전력을 공급했다는 현지 경험담입니다.

비상 전력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F-150 라이트닝에는 SK온의 고성능 하이니켈 NCM9 배터리가 탑재됐습니다. 스탠다드 레인지 모델에 적용된 98kWh급 배터리 팩은 에너지 사용 조건에 따라 최대 10일까지 가정용 전력 공급이 가능합니다.

TV나 세탁기 등 대형 가전을 제외하고 조명, 노트북, 냉장고 등 생존에 필수적인 기기만 가동할 경우 외부 전력 없이도 열흘 가까이 버티는 ‘에너지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포드가 전동화 속도 조절에 베스트셀링카인 F-150 라이트닝의 생산 중단을 결정한 것에 대해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기아 EV9 롱레인지 모델에도 SK온의 파우치형 NCM9 배터리가 적용됐습니다. 98㎾h 배터리 팩을 활용해 미국 현지에서 약 4일간의 정전을 무리 없이 버텼다는 실사용 사례도 공유되고 있습니다. 전기차가 사실상 이동형 에너지저장장치(ESS) 역할을 수행한 셈입니다.

게시글과 댓글에는 “얼음폭풍 동안 우리 집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도와준 포드 F-150 라이트닝에 감사하다”, “약 100kWh 배터리를 탑재한 기아 EV9으로 3.5kWh급 소형 발전기를 충전해 큰 불편 없이 정전을 버틸 수 있었다”, “정전에서 전기차가 가정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적극적으로 알려질 필요가 있다” 등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배터리, 이동에서 ‘생존’ 수단으로…V2G 수익사업까지 확대


배터리 업계는 이번 사례를 통해 전기차 배터리가 단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전력을 즉시 가동해 생존 시간을 늘리는 에너지 자산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합니다. 도로 위에 분산 배치된 전기차 배터리가 ‘이동형 ESS’로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강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재난 상황에서도 일상에 가까운 환경을 유지하게 해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높였다는 후기도 있습니다. 화석 연료 발전기의 소음과 매연 없이 실내 주차장에서 조용하고 깨끗하게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점도 강점입니다.

전기차 배터리의 경쟁력은 주행거리와 충전 경쟁을 넘어 전기차와 전력망을 연결하는 ‘양방향 전력 송전 기술’(V2G)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전기차에 저장된 전력을 전력 수요가 높은 피크 시간대에 지역 전력망에 공급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방식입니다.

태양광 에너지 기업 선런(Sunrun)과 메릴랜드주 전력 유틸리티 회사인 볼티모어 가스 앤 일렉트릭(BGE)이 F-150 라이트닝을 활용해 진행 중인 V2G 시범사업이 대표적입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기차주들은 최대 약 1000달러까지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은…“새로운 연결 고민할 시점”


한국의 주거 구조는 미국과 다릅니다. 단독 주택 위주인 미국은 차와 거실을 직접 연결하기 쉽지만 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한국에서는 주차장의 전기차 전원을 집 안으로 끌어오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한국은 이런 이유로 V2L이 캠핑장에서 커피머신을 돌리는 감성 옵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미국 사례는 전기차가 재난 상황에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후 위기로 인한 기습적인 폭우나 정전 사고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기상 현상은 이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상’(New Normal)이 됐고 이는 곧 에너지 안보의 위기로 직결됩니다.

기후 위기 시대 주거 환경과 전기차 배터리의 연결성에 대한 정책적·기술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전기차 배터리를 아파트 단지 비상 전력으로 연계하거나 아파트 단지 내 비상 전력을 전기차 배터리로 보조해 재난 시 주민들의 필수 기기 충전 거점으로 활용하는 구상이 거론됩니다.

내연기관차 시대의 기름 한 통이 대피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전기차 시대의 배터리는 재난 속에서도 일상을 지탱해 주는 에너지 자산입니다. 차가운 얼음 폭풍 속에서 빛을 밝힌 전기차들의 모습은,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자동차가 단순한 ‘탈 것’ 이상의 가치를 지녀야 함을 묵직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V2L 후기글. 페이스북 캡처.


박한나 기자 park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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