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체성을 밝혀도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박주연 2026. 2. 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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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X노동] 변호사이자 활동가 박한희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변호사에게 자주 따라붙는 설명이다. ‘최초’, ‘커밍아웃’, ‘트랜스젠더’라는 단어 모두 무게감 있는 단어일 수 밖에 없는데, 박 변호사는 그걸 늘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빡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점에서는 그리 특별하지 않기도 하다.

 

이번 만남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 소속된 변호사이자 ‘무지개행동’ 활동가를 겸하고 있는 그의 일에 주목하고자 했다. 박한희 변호사는 왜 이 일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일다

영하의 추위가 이어지는 어느 날,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이하 ‘희망법’) 사무실에서 박한희 변호사를 만났다. 요즘은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더 시간을 보낸다며, 연초라 이런 저런 활동 계획 세우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박 변호사와 ‘이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늘 과학자였어요. 어릴 때부터 과학, 수학을 좋아했거든요. 선생님이 자연부장을 하게 해줘서 친구들이랑 과학실 가서 실험하고 그랬죠. 학창 시절 내내 그 꿈밖에 없었어요. 과학자/로봇공학자가 되겠다는 거요.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선생님은 의대 갈 생각 없냐고 그랬는데, 로봇공학하려면 기계공학이나 전자공학해야 한다 그래서 기계공학을 선택한 거예요.

 

-그 꿈은 왜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방해 요소가 있었나요?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로봇 연구소에서 인턴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대학 때부터 성정체성 관련된 고민이 깊어지면서 혼란이 시작되었어요. 중·고등학교 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면 대학을 다니면서 시야도 넓어지고, 여러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됐거든요.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건 알게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았어요. 우울이 시작됐죠.

 

지금 상태로 로봇공학자가 되더라도, 내가 ‘나로서’ 이루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속 가면을 쓰고 숨어든 상태에서 그 꿈을 이루더라도 즐겁지 않을 것 같았어요. 정말 내가 이루는 게 아니니까. 그때부터 자포자기가 됐어요. 미래에 대한 생각도 접었죠. 그냥 되는대로 살자, 꿈이 무슨 소용이냐고요.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어요. 어쨌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기숙사와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4년 내내 기숙사에 있었는데 당연히 남자 기숙사였고, 공용 샤워실을 써야만 했어요. 이런 생활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서울로 가자. 혼자 살자’고 생각했죠. 회사를 선택할 때 기준은 그것 뿐이었어요. 사실 기계공학 전공하고 서울에서 근무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엔지니어링 회사에 들어갔고, ‘기계 구매’ 파트에서 일했어요. 사실 이 일은 영업, 마케팅 쪽에 가까워서 주로 돈 협상하는 일을 했어요.

 

그 회사에서 2년 2개월 일했는데, 1년차 때는 그냥 돈 벌자는 생각으로 있었는데 2년차부터 ‘이걸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하지?’ 싶더라고요. 전공으로 배운 걸 써먹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리고 ‘언제까지 내가 정체성을 숨기고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언젠가 남에게 아웃팅을 당하든 내가 참다가 폭발해서 말해버리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고, 그 때 회사가 날 지켜주지도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다른 일을 해야겠다 결정하게 됐어요.

 

-로스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트랜스젠더 임이 밝혀졌을 때도 짤리지 않는 일이어야 했어요. 그럼 내가 사장이 되어 어떤 가게를 운영하던가, 전문적인 자격증이 있어야겠더라고요. 변리사, 변호사, 의사를 생각했는데 마침 대학 동기 중 하나가 로스쿨 나와서 변호사를 하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로스쿨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트랜지션’은 로스쿨 들어간 이후에 하신 건가요?

 

로스쿨에 ‘남학생’으로 입학했고 1학년을 보냈어요. 그리고 나니 30살이더라고요. 추운 겨울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20대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가 버렸네...’ 싶은 거죠. 그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휴학을 했어요. 그 때 부모님한테 커밍아웃하고 트랜지션을 시작했죠. 학교에선 뭐 어차피 졸업하면 끝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다만 한국의 법조계에서 트랜스젠더를 변호사로 고용해 줄 것인가 걱정이 되긴 했죠. 기껏 자격증도 땄는데 일을 못하면 소용 없잖아요. 그래서 이리 저리 찾아보다 희망법에 연락을 했어요. 희망법이 성소수자 관련 사건을 맡아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혹시 진로 상담도 해줄 수 있냐고 문의한 거죠. 한가람 변호사를 만나 얘기를 하게 됐어요. 사실 그 때까지 공익변호사라는 게 뭔지도 몰랐어요.(웃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의 공익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네요?

 

아무 계획이 없었어요. 대학 때 정체성 고민을 시작하면서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에 ‘10년 뒤에 무엇을 한다’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질 않았죠. 다만, 돈을 벌지 않으면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지인으로부터 ‘로스쿨에 가면 성소수자 비율이 꽤 된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는 최근 로스쿨 졸업한 신입 중 LGBTQ+ 비율이 13%나 된대요.

 

꽤 있긴 한 것 같아요. 여성 퀴어 법조인 모임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성소수자의 경우 (성정체성 문제로)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 애초에 회사에 들어가는 게 힘든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사실 저도 로스쿨 졸업하면, 로펌 같은 데 들어갈 생각은 애초에 안 했고, 그냥 내 사무실 차려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반 회사에서 버티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회사 다닐 때 주말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나가서 놀고 그랬는데, 월요일에 출근하면 ‘주말에 뭐 했냐’는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집에 있었다 그러면 ‘왜 집에만 있냐’ 그러고, 종종 회사 동료가 같이 만나자고 초대하면 거절했는데 그럼 ‘너 왜 나 피하냐?’는 얘기를 듣게 되죠. 내가 나로 산다는 이야기를 못 하잖아요.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른 일을 찾게 되는 거죠.

 

-공익변호사로 일하는 건 어때요? 재미있어요?

 

내 가치관과 일이 일치한다는 점은 정말 좋아요. 사실 일반 회사의 직장인들은 그게 잘 안 되잖아요. 보통은 자아실현은 딴 데서 하고 일은 그냥 일이다 분리하는데, 전 그게 한번에 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로스쿨 들어갈 때 막연하게 ‘그래도 내가 성소수자들을 위한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다’ 생각했었는데, 그 목표도 이루고 있으니까 좋죠. 물론 수입은 다른 변호사에 비해 낮을 수 있어도요.

 

▲ 2025년 7월 4일 희망법 박한희 변호사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지림 변호사와 함께 대한변호사협회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승소’의 과정과 의미를 이야기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8OPGB3KAt4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적은 언제예요?

 

 

아무래도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에서 이겼던 일이죠.(참고: 혼인평등으로 가는 길, 첫 단추가 꿰어졌다 https://ildaro.com/9597) 이 건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김재림 변호사가 메인으로 담당하고 저도 함께했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소를 제기할 때만 해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지만 열심히 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심에서 이겼을 때 너무 기뻤어요. 주변에서도 반응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한국에서도 이게 되네? 문을 두드리면 열리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면 된다’는 걸 배운 사건이어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을 준 것 같고요.

 

-우리 사회에서 너무 의미 있는 판결이었죠. 혹시 법조인들 사이에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하여 어떤 분위기의 변화가 좀 느껴지나요?

 

매년 ‘LGBTQ 법률가 대회’를 희망법이랑 공감 등이 2015년부터 진행하고 있는데요. 1박 2일 캠프인데, 작년에도 45명 정도 왔어요. 참여자도 계속 늘고 있죠. 그만큼 성소수자 법조인도 늘고 있고. 특히 젊은 층에선 ‘다른 나라에서 다 혼인평등이 되는데, 우리만 안 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 반박할 논리가 오히려 없지 않냐?’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잖아요. 한국만 왜 안 되는데? 했을 땐 할 말이 없죠.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도 대법원 판결까지 오래 걸렸고, 사실 판결이라는 게 언제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 과정에서 답답함이나 스트레스는 없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언제든 나오겠지’ 생각해요. 엄청 계획을 세우기 보다 그때 그때 맞춰서 하면 된다는 타입이어서요. ‘왜 판결이 안 나오지?’ 하면서 스트레스 받진 않아요.

그래도 일하면서 스트레스가 없진 않죠. 일단, 일이 너무 많고요(웃음) 어떤 일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건 괜찮은데, 지금 희망법 일도 하고 무지개행동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여러 일들을 해야 하니까 좀 힘든 것 같아요. 역할에 맞춰서 모드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요.

 

▲ 2025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이해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 행진〉에서 발언 중인 박한희 변호사. ‘평등이 중심이 될 때에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이 민생을 살리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길’이라고 말했다. (출처: 무지개행동)

-일하다가 스트레스 받으면 무엇을 하나요?

 

 

술 먹어요.(웃음) 건강이 걱정되니까 운동도 하죠. 산을 좋아해서 등산도 자주 가는 편이에요. 한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갔는데 민변 산악회랑 성미산마을 산악회 소속이거든요. 한 달에 한 번은 가려고 하고 있어요. 올해 10km 여성 마라톤에 참여할 예정이라 그 준비도 해야죠.

 

-올해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가요.

 

작년부터 무지개행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거든요. 무지개행동 활동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 중이고, 그와 관련된 캠페인을 진행하려 하고요.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무지개행동이라는 연대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럼 박한희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사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10년 뒤도 예측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하려고 해요. 그리고 지금까진 이것저것 활동도 하고 여러 곳에 관심을 두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좀 집중을 하고 싶어요. 생각해 보면 20대를 내가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때 못했던 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막 했던 것 같아요. 이제 만으로 마흔 살이거든요. 나에게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일단 차별금지법 제정을 진짜 이뤄내고 싶고,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싶어요.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는 모습이요. 그렇게 살아가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는 사람. 이런 인터뷰도 50살에 또 하면 좋겠네요.(웃음)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실 것 같은데, 어떤 노동자로 살고 싶은가요?

 

현장에서 연대하는 노동자요. 청소년 노동자, 이주 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등 정말 여러 노동자가 있잖아요. 그들과 계속 연대하고 만나는 경험을 하고 싶어요. 나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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