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숲을 만듭시다! [신영전 칼럼]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저는 책입니다. 다른 쓰레기와 뒤섞여 매립지에 묻힌 채 이 글을 씁니다. 부디 잠시 시간을 내어 읽어주시길! 지난 한해 버려진 책은 약 2천만권에 달합니다. 정확한 수치를 말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책 폐기는 환경부 통계에서 별도 항목으로 분류되지 않고 ‘폐골판지’, ‘혼합폐지’로 합산 집계되기 때문입니다. 한해 7천만~8천만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지만, 그중 10~24%가 반품 폐기 됩니다. 2024년 전국 대학 도서관에서 버려진 책도 약 300만권, 지난 5년간 1천만권에 달합니다. 이사하며 버린 책과 매해 정년을 맞는 2천명 교수들의 책은 이 추계에서 빠져 있습니다. 이 중 가장 홀대받는 것이 저같이 오래된 책이지만, 그중엔 역사의 보물도 섞여 있습니다. 버려진 저는 수거 업체가 겉옷을 뜯어내거나 통째로 파쇄와 약품 처리 후 종이 펄프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활용되는 책은 극히 적고 대부분 다른 쓰레기와 함께 소각·매립되지요.
당신이 한때 저를 사랑한 것을 압니다. 부모, 선생에게 배운 지식과 당신의 체험이 만든 논리의 골격도 저로부터 왔지요. 문화 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은 책이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토대를 제공했고, 인지 신경학자 메리앤 울프는 인간에게 ‘숙고하는 시간’을 제공하여 지적 발달을 이끌었다고 했습니다. 상상력의 질료가 되어준 것도, 문명의 지식을 모아 후대로 전하는 기억 저장고 역할을 한 것도 저라고 칭송했지요. 어릴 적 당신이 잠들기 전에 함께했던 것도 접니다. 당신은 그 동화책 속 주인공을 닮았겠지요? 도서관, 카페, 지하철 안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힘, 위로, 안식을 주고 삶을 풍성하게 했다고 저를 꼭 안아주던 때를 기억합니다. 당신이 여백에 적어놓은 글귀도, 책갈피에 꽂아놓은 붉은 낙엽과 네잎클로버도 저는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박경리의 ‘토지’(9400쪽),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2700쪽)를 끝까지 읽은 이를 찾기 힘들고 논술 공부 때도 1~2쪽 요약문만 읽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저보다 인공지능에 직접 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신을 탓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책이란 “정신적 소산물을 체계 있게 담고 있는 물리적 형체”이니, 꼭 종이책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이제까지 출판된 종이책들을 디지털화라도 하지 않고 버린다면, 인류가 그간 쌓아온 소중한 지적 성과물은 사라질 겁니다. 이 속도대로라면 조만간 버릴 종이책마저 남지 않을 겁니다. 급합니다. 그땐 참고할 정보를 찾지 못한 인공지능이 “잘 모르겠다” 또는 ‘오답’만을 내놓겠지요. 과거를 잊은 인공지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당신은 저를 체계적으로 보존해야 합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정년퇴임 또는 작고한 저명 인문학자의 소장 자료를 기증받습니다. 책뿐만 아니라 남겨진 메모, 연구 노트, 일기 등을 포함한 연구 과정의 기록을 폭넓게 수집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국문학연구자료관’을 운영하지요. 보관 공간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립대학 공동보존서고’도 운영합니다. 일반 고서점과 달리, 물류 전산시스템과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학 및 연구자와 제휴하여 대량의 책을 수거하고 재순환시키는 민간 기업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것이 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입니다.
우리도 만듭시다! 그 일을 ‘책의 숲 프로젝트’라 부릅시다. 버려지는 모든 책을 수집, 분류, 전산화하고, 보존, 활용하는 기관을 만듭시다. 그 공간에 어린이들이 와서 마음껏 놀며 책을 읽고, 학생, 학자, 고령자들이 공부와 연구를 할 수 있는 곳, 희귀 고서 전시장도 만듭시다. 도시 인근 빈 대학 건물, 폐허가 된 어린이 영어마을 등의 공간을 활용하면, 적은 돈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당연히 대통령의 말 한마디, 관련 부처 장관의 의욕, 선거를 앞둔 자치단체장 후보자의 공약과 이행이 필요합니다. 책의 숲 속에 무엇보다 만들고 싶은 것은 ‘책 묘지’입니다. 모든 역할을 다한 책에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러주고 묻어주는 곳 말입니다. 저는 그곳이 인류가 만들어낼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책 읽기 전 손을 씻고 찢어진 책은 꼭 수선하여 후대에 전하라”는 가훈을 남긴 이도 있고, 저를 많이 사랑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나는 언제나 천국이 도서관의 일종일 것이라고 상상해왔다”고 했지요. 한해 2천만권의 책을 쓰레기장에 버리는 지금, 정작 파기하고 있는 것은 기억, 추억, 역사, 문화뿐만 아니라 당신의 천국일지도 모릅니다. 책으로 숲을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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