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치매 공공신탁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은퇴를 했는데 자가에 살고 있고, 예금·주식 등 현금성 자산으로 2억~3억원이 있고, 국민연금도 매달 150만원 정도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온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치매가 오면 어떻게 될까?
병원부터 다녀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하며, 치매에 좋다는 요법이나 영양 보충도 해야 한다. 다 돈이 드는 일인데, 부양가족이 있어도 아무도 내 통장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식구들이 어려움에 처한 끝에 가정법원에 성년 후견인 신청을 하는데, 법원 판사님이 정신 감정부터 요구하고 변호사 비용도 필요하다. 어찌어찌해서 후견인 지정을 받아도 식구 중 의견이 안 맞아 분쟁이 생기면 지정을 취소하기도 한다. 평생 고생해서 모은 자산을 지인 중 누군가 횡령하기도 하고, 나는 기저귀도 제대로 갈아주지 않는 요양시설에 방치돼 있다가 죽으면 통장에 동결돼 있던 자산은 자식들 상속 다툼으로 귀결된다.
누군가가 어느 증권사가 취급하는 '가족신탁'을 알아보라 해서 상담을 했더니 최소 신탁 금액이 10억원대를 훌쩍 넘어가고 수수료도 만만치 않다. 극소수 자산가만 이용할 수 있고 나에겐 '그림의 떡'이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우리나라 치매 환자 수가 이미 100만명을 넘었고 '치매 머니', 즉 치매로 동결된 자산 규모도 172조원에 이르러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가상 사례는 이제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공공신탁은 이러한 경우에 대비해 도입이 시급한 제도인데, 싱가포르는 이미 2009년에 사회가족부가 도입해 시행 중이다. 이재명 정부도 치매 공공신탁 도입을 국정과제로 채택했고, 국민연금공단이 올해 4월부터 시범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공단은 2022년 5월부터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신탁 자산관리 서비스' 시범사업을 거쳐 작년 10월부터 본사업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앞으로 치매 공공신탁이 도입되면 뭐가 달라질까? 공공신탁은 치매에 걸린 후가 아니라 걸리기 이전에 공공기관과 신탁계약을 미리 맺어놓는 것이다. 이때 내 자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자세하고 꼼꼼하게 작성한 후 공공기관과 1부씩 나눠 보관한다. 평소에는 내가 관리하다가 혹 치매에 걸리면 그때부터 자산관리 권한이 공공기관으로 넘어가는데, 식구들은 내가 사전에 작성해놓은 대로 나의 병원비, 약값, 외식비, 해외여행비 등에 대해 공공기관과 협의해 내 통장에서 인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 간에 돈 문제로 싸울 일이 생기지 않는다.
또 죽을 때까지 공공기관이 관리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횡령 등을 꿈도 꾸지 못하고, 남은 자산은 내가 미리 정해둔 대로 공공기관이 상속 등 처분해주며, 그래서 민법상 유류분 다툼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또 중산·서민층도 이용할 수 있도록 최소 신탁 금액이 낮게 설정될 것이며 공공기관이 운영하기 때문에 수수료 부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치매 공공신탁은 초고령사회에 확실한 내 자산 지킴이(guardian)이자 나의 가장 충직한 집사(steward)다.
[장재혁 국민연금공단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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