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화폐 이야기] 36. ‘신의 직장’이라는 환상과 ‘철밥통’이라는 오해의 진실

강승구 2026. 2. 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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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의 손실, 사회의 이익
공기업은 왜 항상 비효율로 오해받는가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대표적인 국내 주요 공기업 리스트 [조폐공사 제공]


매년 초겨울이 되면 서울 양재동 aT센터 앞은 이른 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선다. 영하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꺼운 외투를 여민 채 줄을 선 이들은 대부분 2030 청년들이다. 바로 ‘공공기관 채용정보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2024년 기준으로 전국 327개 공공기관이 뽑는 신입사원은 고작 2만 명 남짓이지만, 이 이틀간의 행사에는 무려 5만명에 육박하는 구직자가 구름처럼 몰려든다. 한국전력이나 코레일 같은 인기 기관의 경쟁률이 100:1을 가뿐히 넘기는 모습은 이제 우리 시대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한국조폐공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25년 채용 당시 54명을 뽑는 자리에 5000여명이 지원해 95:1이라는 압도적인 숫자를 기록했다. 바야흐로 ‘공기업 고시’의 시대다.

청년들이 이토록 공공기관에 열광하는 이유는 선명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최우선 가치가 된 ‘고용 안정성’과 ‘워라밸(Work-Life Balance)’,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의 배경이나 학벌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블라인드 채용’의 공정성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좁은 문을 통과한 ‘능력자’들 중 상당수가 입사 1~2년 만에 사표를 던지거나 다시 이직 시장으로 나온다. 왜일까? 그들이 기대했던 ‘신의 직장’과 실제 마주한 ‘공조직의 현실’ 사이에 거대한 골짜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기업을 단지 안락한 울타리로만 여겼던 이들에게, 조직이 짊어진 복잡한 운영 원리와 공공성이라는 무게는 때로 견디기 힘든 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한국조폐공사가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지난해 국회도서관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화폐 기술의 미래’에 이어, 이번에는 공기업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낸 ‘공기업의 미래’를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공기업은 정말 철밥통인가?”라는 발칙하면서도 뼈아픈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외부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내부의 생생한 에피소드와 현직자들의 날카로운 고백을 담아내며, 공기업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우리가 흔히 공기업을 비난할 때 전매특허처럼 꺼내 드는 단어는 ‘비효율’이다. 하지만 이 책은 공기업의 독특한 이중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공기업은 정부 기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한 민간 기업도 아니다. 국민의 세금과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기에 ‘공공성’이라는 가치를 절대 포기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시장 논리에 따른 ‘수익성’과 ‘효율성’을 증명해 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쉽게 말해 ‘돈을 벌면서도 국민의 편익을 위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셈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례가 등장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쳤을 때를 떠올려보자. 만약 한국전력이 이익만을 쫓는 민간 기업이었다면 생존을 위해 전기료를 대폭 인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전은 국민의 가계 부담을 덜기 위해 인상을 최소화했고, 그 결과는 수십조 원의 적자로 돌아왔다. 코레일이 KTX 요금을 10년 넘게 동결해 온 것 역시, 수익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국민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처럼 공기업의 의사결정은 단순히 엑셀 표 위의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국민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묵묵히 감내하는 ‘보이지 않는 책임’이 깔려 있다.

공공기관 취업 준비생들을 위해 조폐공사 현직 직원들의 실질적인 조언과 공기업 채용 정보를 수록한 신간 ‘공기업의 미래’ [조폐공사 제공


책은 공기업의 운영 원리를 제도와 업무, 그리고 사람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풀어낸다. 특히 매년 공기업 직원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경영평가’ 뒷이야기는 한 편의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평가위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관의 핵심 성과인 ‘BP(Best Practice)’를 발굴하려 머리를 맞대는 과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사안일한 ‘철밥통’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수백 장의 보고서를 다듬고 수개월간 실적을 검증받는 현직자들의 모습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본능을 보여준다.

변화의 물결은 조직 내부에서도 거세게 일고 있다. 종이 전표를 없애는 사소한 디지털 전환부터, CEO가 직원들과 격식 없이 소통하는 타운홀 미팅에 이르기까지 혁신의 목소리는 현장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는 단순히 외부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내부의 위기감이 발현된 결과다.

결국 공기업은 단순히 고용 안정만을 보장하는 직장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실핏줄 같은 인프라를 유지하고, 소외된 이웃을 살피며, 지역 사회와 상생하는 사회적 가치의 보루다. 한국조폐공사가 사용하지 않는 특허 기술을 중소기업에 무상으로 이전하거나, 대전의 명물 성심당과 손잡고 ‘광복절 빵’을 구워내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에피소드는 공기업이 나아가야 할 따뜻하고도 창의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공기업 취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막연한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적인 전략을 짜게 돕는 정밀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업무가 국민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기며 자긍심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공기업의 미래』는 결국 우리 사회가 공공의 영역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가치를 소중히 지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모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철밥통’이라는 비아냥을 ‘황금 밥그릇’으로 바꾸는 힘은, 결국 그 조직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진구 한국조폐공사 화폐박물관장


강승구 기자 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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