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에 영혼 체인지까지, 사극의 변화는 어디까지?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6. 1. 3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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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애하는 도적님아》, 판타지까지 섞는 사극의 변신 보여줘
사극도 이제는 역사보다 ‘재미’가 중요한 시대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현재에서 조선시대로 날아가고, 영혼이 뒤바뀐다. 판타지 장르의 한 대목처럼 들리지만, 요즘 이런 설정들이 사극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중심에 두고 상상력의 진폭을 넓혀왔던 사극은 어째서 이제 그 경계 바깥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걸까.

낮에는 의녀지만 밤이 되면 복면을 쓰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홍길동. KBS 토일드라마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이런 설정은 사실 그리 낯설지 않다. 2024년 방영된 《밤에 피는 꽃》이 낮에는 과부, 밤에는 복면 의적으로 살아가는 여성 히어로를 그려낸 바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중생활을 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사극 역시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됐다. 2023년 방영된 《혼례대첩》은 청상과부지만 정체를 숨긴 채 한양 최고의 중매쟁이로 활약하는 여성의 달콤한 로맨스를 담아냈다. 그러니 《은애하는 도적님아》 속 복면 히어로 설정 자체만 놓고 보면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복면 의적인 은조(남지현)와 그의 정체를 추적하는 도열대군 이열(문상민)의 쫓고 쫓기는 청춘 멜로 흐름을 타다가, 어느 순간 과감하게 판타지로 방향을 튼다. 한 동자승이 각각 채워준 팔찌로 인해 은조와 이열의 영혼이 뒤바뀌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이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반색하는 분위기다.

KBS2 드라마 《은애하는 도적님아》 포스터 ⓒKBS2

역사의 틀을 벗어나자, 사극이 달라졌다

시간을 10년만 되돌려보면 이런 반응은 사실 놀랍다. 개연성이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엄밀한 잣대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던 사극의 세계가 아니던가. 

그래서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을 굳이 나누고, 정통이라면 반드시 역사적 사실의 틀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다. 퓨전이라도 역사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만 상상력이 허용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그런데 퓨전이라고 해도 영혼 체인지 같은 판타지가 사극에 불쑥 끼어드는 일이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반색하는 시청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지금의 사극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이제 사극에서 역사는 더 이상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판타지 설정 역시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해진 것은 오직 '재미'다. 얼마나 과감한 상상력으로 얼마나 '꿀잼'을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과감한 영혼 체인지 설정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현대극에서 남녀의 영혼 체인지가 만들어내는 성별 교환의 코미디와 서로에 대한 이해에 근간한 휴먼 드라마가 재미 요소라면, 사극에서는 그 강도가 훨씬 세다. 성별과 태생,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영혼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왕자가 하루아침에 얼녀이자 과부의 처지가 되고, 반대로 얼녀이자 과부는 왕자가 되어 궁궐에 들어간다. 어찌 웃음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더욱이 두 사람은 서로 은애하는 사이다. 그러니 더더욱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고, 사랑 역시 더 절절해진다. 여기에 남녀 차별, 적서 차별, 신분 차별 같은 구조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판타지의 카타르시스도 빠지지 않는다. "네가 그 입장이 돼 봐. 함부로 말할 수 있겠어?" 사극이 판타지를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질 때, 시청자들은 환호한다.

판타지까지 과감하게 끌어안는 사극의 변화는 사실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10년대 중반에도 사극에는 용과 같은 판타지 요소가 등장한 바 있고, 설화나 전설을 사용한 사극 역시 《전설의 고향》 시절부터 2021년 장태유 감독의 《홍천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작됐다. 하지만 영혼 체인지나 타임리프처럼 현대극에 어울릴 법한 과감한 판타지가 사극 전면에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변화다.

지난해 방영돼 최고 시청률 17.1%(닐슨코리아)를 기록하고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던 《폭군의 셰프》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현대의 프렌치 셰프가 비행기 화장실에서 《망운록》이라는 고서적을 펼쳤다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사극이 '과거'라는 시간대가 중요한 서사적 장르라면, 현대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이 타임리프 설정은 이러한 시간적 제약을 뒤흔들어 버린다.

조선시대로 날아간 프렌치 셰프는 현대에서 익힌 프랑스 요리법을 조선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펼쳐 보인다. 고추장 버터 비빔밥이나 흑임자 마카롱처럼 전통 한식과 프렌치 파인 다이닝이 결합한 요리들은 현재와 과거, 현대극과 사극의 '비빔'이기도 하다. 사극은 이 과정을 통해 시간이라는 역사적 제약의 틀에 상상력의 구멍을 뚫는다. 그 틈 사이로 다양한 장르적 이야기를 변주해 넣는다. 시간의 간극을 엄밀히 구분해 왔던 사극과 현대극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영혼 체인지 역시 같은 맥락이다. 판타지 설정 하나로 조선이라는 시공간이 지닌 차별적 질서와 제약이 순식간에 흔들린다. 사극에 보수적인 시청자에게는 다소 가볍고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의 웹소설과 웹툰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이 가벼움은 오히려 사극을 다시 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이 판타지들은 사극 하면 늘 떠올렸던 정치, 전쟁 같은 무거움을 가볍게 밀어낸다. '어, 이건 좀 새로운 맛인데?' 하는 사극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퓨전이 생겨난다.

K콘텐츠 시대가 불러온 변화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왜 생겨난 걸까. 시대가 변하면 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 사극은 비교적 보수적인 관점에 머물러 있었다. 《주몽》처럼 사료가 많지 않은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조차 늘 역사 왜곡 논란의 잣대에 올랐던 이유다. 하지만 《허준》 《상도》 같은 퓨전 사극을 거쳐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같은 팩션 사극이 등장하고, 웹툰과 웹소설이 좀 더 과감한 사극의 변용을 시도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특히 글로벌 OTT와 결합한 사극의 변신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장르들과의 혼합에 불을 붙였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좀비 장르를 결합한 《킹덤》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이 작품에 열광했고, 극 중 등장한 '갓'은 글로벌 힙스터 문화의 아이콘으로 소비됐다. 사극은 더 이상 한국인들만이 소비하는 장르가 아니게 됐다. 글로벌 시장으로 진입한 사극은 로컬 문화와 역사를 세계 시청자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르적 장치들을 요구받았다. 《폭군의 셰프》 같은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 역시, 퓨전 음식이라는 보편적인 흥미 요소와 요리 서바이벌이라는 익숙한 서사 구조를 결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선이 존재한다. 단적으로 《폭군의 셰프》의 원작 웹소설 제목이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웹소설은 실존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드라마는 인물 이름을 모두 가상의 존재로 교체했다. 여전히 사극이 역사로부터 빚지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고, 따라서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려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글로벌 시대에 K콘텐츠라고 불리는 사극의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을 마주했다. 이제 사극은 역사 재현을 넘어, 허구로서 어떤 장르적 퓨전을 더해 새로운 변신을 거듭할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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