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하는 <합숙 맞선>,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 뒤에 숨은 한심한 냉소주의[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2026. 1. 3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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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자식 방생 프로젝트 합숙 맞선>. SBS 제공

최근 상간죄 의혹으로 통편집 된 SBS <자식 방생 프로젝트 합숙 맞선>(이하 <합숙 맞선>) 출연자 논란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들키는 건 시간문제인데 대체 어떤 생각으로 연애 프로그램에 어머니까지 함께 나올 생각을 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드는 생각. ‘그런데 어머니와 같이 연애 프로그램 나오는 거 자체가 이상한 일이잖아.’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후반까지의 성인 남녀들이 각자의 어머니와 함께 입소해 5박6일 간 합숙하며 결혼 상대, 더 나아가 어머니들의 며느리와 사윗감을 찾는 <합숙 맞선>의 매 순간은 정말 이상하다. 각 출연자들은 매력적인 결혼 상대로 보이기 위해 잘 성장한 개인임을 어필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어필 상당 부분은 그들 어머니 입을 통해 전달된다. 내가 자립적인 성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머니의 증언을 신청하는 기묘한 모순. 물론 이 모순은, 결혼은 현실이라는 무적의 명제로 쉽게 봉합된다. “부모님이 결혼에 개입을 엄청 많이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라는 패널 서장훈의 말대로 한국에서 많은 경우 결혼이란 당사자만이 아닌 양가가 만족할 만한 계약이어야 하고, 그래야 행복하다는 경험적인 믿음 역시 공고하다. <합숙 맞선> 내내 강조되는 직업 안정성, 연봉, 학벌, 집안 형편 등에 대한 바람과 탐색, 계산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다. 가령 남자 출연자 장민철의 어머니는 아들 부부에게 명절마다 오라고 하지 않겠노라 공언한다. 명절을 앞두고 남편 부모님 댁 방문과 가사 문제로 흉흉해지기 일쑤인 한국에서 ‘시어머니 후보’의 이런 면모는 결혼 선택을 위한 유용한 정보가 될 수도 있다. 손주를 봐줄 수 있다는 여성 출연자 김현진 어머니의 말에 남자 출연자 이승학의 어머니가 마음이 끌린 것도 마찬가지다. 결혼과 함께 부수적으로 따라올 현실적 요소들을 차라리 미리미리 공개해 숙고할 기회를 주겠다는 <합숙 맞선>의 기획은 더 실용적인 방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합숙 맞선>의 진정 해로운 지점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시대착오적인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왜 아니겠는가. 결혼을 사랑하는 개인끼리의 주체적 결합이 아닌 양가 간 거래로 보는 관점에서 좋은 사윗감, 며느릿감의 덕목은 전통적 가정과 젠더 규범에 종속되기 십상이다. 당사자가 아닌 어머니가 마음에 드는 상대방을 선택하는 이벤트는 나이가 들어도 양육 담당자로서 아이에 간섭하는 ‘치맛바람’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낡은 젠더관을 드러내거니와, 그 선택의 결과는 더더욱 노골적이다. 변호사인 걸 밝힌 순간(이것도 어머니의 자식 소개로 이뤄진다) 여성 출연자 어머니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서한결은 다섯 중 세 명의 선택을 받았다. 한편 여성 출연자 중 역시 가장 많은 세 남자 어머니의 선택을 받은 현진은 성악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프리랜서다. 예술가에 대한 동경이나 그를 포함해 세 딸을 예체능 전공으로 길러낸 집안의 경제력에 대한 고려도 있었겠지만, 정말 흥미로운 건 아들이 좋아하는 김묘진 대신 현진을 선택한 승학 어머니의 이유다. 서강대학교에서 화공생명공학을 전공하고 외국계 의료장비 회사에 다니는 묘진은 너무 스펙이 높아 부담스럽다는 것. 남성의 스펙은 높을수록 좋지만, 여성의 스펙은 나쁘지 않되 너무 높아도 안 되는 이 불균형은 능력 있는 가부장과 그런 가부장에 ‘어울리는 조력자’로서의 아내라는 전통적 모델로 소급한다.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합숙 맞선>에서 재현되는 이데올로기의 구태의연함을 드러낸다 한들, 폭로의 효과는 미미하다. 이 프로그램을 지배하는 건 낡은 규범에 무비판적인 순진함이 아니라, 낡은 규범이고 틀린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이유로 순응하는 냉소적 이성이기 때문이다.

냉소적 이성이란 말하자면 체념의 합리화다. 개인이 아닌 집안 간 거래로서의 결혼에서 정작 당사자들은 여러 선택에서 자주 소외되고, 특히 양측 가부장의 암묵적 계약과 함께 여성 파트너가 남편 친가에 종속되는 가부장 모델이 재생산된다. 당연히 불평등한 관계이며, 불만족과 갈등의 씨앗이 잠재한다. 냉소주의자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전통 가족 모델이 평등한 관계와 각자의 자아실현에 구속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주체적이고 단단한 개인이 결합해 자유롭고 평등한 결혼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이상적 모델이라는 것도 안다. 알지만, 그럼에도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로 이상을 ‘합리적으로’ 기각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한다. 여성 출연자 어머니들이 변호사인 한결에게 몰리는 것에 대해 서장훈은 “어쩔 수 없어요”라 말한다. 이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박찬욱의 비슷한 영화 제목이 그러하듯 어쩔 수 없다는 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허용되지 않게 몰린 상황에서의 선택이다. 즉 결혼을 스펙만 보고 접근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체념은 다른 선택지가 불가능하기에 오직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이 된다. 안정적인 고소득 전문직에 대한 부모의 선호는 분명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건 다르다. 후자에서 전문직에 대한 선호는 현실적 고려의 경로 중 하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이며 그것만이 현실이다. 그러니 그 바깥에서 이상과 낭만을 추구하는 건 비현실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냉소의 대상이 된다. 결혼은 현실이라는 그 자체로는 상식적이고 실은 풍부한 맥락을 지닌 명제가 결혼에 대한 기존 질서와 통념을 정당화하는데 그치는 건 그래서다.

앞서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거야말로 <합숙 맞선>의 진정 해로운 점이라 한 건 그래서다. 철학 사조로서의 실용주의(pragmatism)가 인간의 경험적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실천을 현실적인 것으로 다뤘다면, 한국에서의 실용주의, 특히 이명박 이후의 실용주의는 이상과 그 가능성을 폄하하고 ‘내가 해봐서 아는’ 만큼의 경험만을 현실로 간주하고 자연화한다. 이런 실용주의는 냉소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현실로서의 결혼을 강조하면서 결국 낡은 가족 모델과 이념을 반복하는 <합숙 맞선>의 실용도 마찬가지다. 명절에 아들 부부가 안 와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어머니의 의사는 실용적 정보일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부모님 의사와 상관없이 남성이 명절 모임을 본인 선에서 차단하거나 조율할 결기가 있느냐는 정보 역시 실용적이며, 실은 앞으로 함께 둘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배우자 선택에서 더없이 현실적인 문제다. 가부장제 너머의 상상력과 실천이 그러하듯, 상상이란 현실의 반대가 아니라 현실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과 실천의 가장 큰 적은 냉소다.

어쩌면 <합숙 맞선>의 문제는 시대착오적인 연애 프로그램 하나만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도덕적으로 미심쩍은 수많은 콘텐츠들이 이제는 잘못된 신념으로 무장한 확신범보다는 냉소적 현실주의자의 태도로 알리바이를 확보한다. ○○가 나쁜 건 알아, 알지만 현실적으로…, ○○가 좋은 건 알아, 알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냉소적 이성 앞에서 왜 나쁘고 왜 좋은지에 대한 도덕적 설명과 논증은 자주 무력해진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지만 이것이 변화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거부해야 할 건 결혼은 현실이라는 명제가 아니다. 이 거부는 현실 대 이상이라는 냉소적 이성의 양자택일적 세계관에 포섭된다. 우리가 거부해야 할 건 스펙만이, 경제력만이, 학벌만이 현실이라는 그 협소한 세계관이다. 가령 기혼자로서 나는 종종 파트너와의 유머 코드가 맞는 게 서로의 결속에 얼마나 핵심적인지 강조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다른 기혼자들이 격렬히 공감하거나 부러워한다. 무엇에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도덕적 정치적 입장의 상당한 일치와 맥락의 공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결혼 안에서 생생히 경험되는 명백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는 현실이라는 여러 버전의 냉소적 현실주의 앞에서 그 너머 얼마나 다양한 현실들이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을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문화적 재현이 중요한 이유이며, 문화적 재현으로서 <합숙 맞선>이 한심한 이유다. 도덕적 불만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물론 앞에 길게 썼듯 불만은 많다). 재미의 첨단을 고민해야 할 지상파 예능이 냉소라는 게으른 선택을 한 것에 한심하다는 말보다 ‘현실’적인 평가는 없어 보인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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