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아도 되는' 여자들의 야구를 꿈꾼다
[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 다시 읽기)]
[미디어오늘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딱 한 번 사회인 야구를 체험한 적이 있다. 일평생 글러브 한 번 잡아본 일이 없고, 야구공은 선수들 사인볼만 잡아본 내가. 비교적 집에서 가까웠던 여자 사회인 야구팀의 훈련장에서 나는 3시간 동안 인생 첫 야구 훈련을 했다. 워밍업 1시간, 주루·포구·송구·타격 연습만 2시간. 운동하지 않는 몸에게 그 3시간은 억겁의 세월이었다. 도루 연습의 일환으로 투수가 피칭을 하면 2루로 달리고, 1루를 쳐다보면 귀루하라는데 몸은 매번 어긋났다. 만만히 봤던 알루미늄 배트는 드는 것 자체가 무리일 만치 무거웠고, 수평으로 휘두를 때마다 손목 인대가 나갈 것 같았다. 내가 던지는 거의 모든 공은 '바닥에 패대기'로 귀결됐다.
올해 미국프로여자야구(WPBL)가 72년 만에 재출범한다. 세계 유일의 여자 프로야구 리그다. 여기에는 4명의 한국인 선수가 뛸 예정이다. 김현아(보스턴), 김라경(뉴욕), 박주아(샌프란시스코), 박민서(뉴욕). WPBL에 진출한 이들을 두고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최초'라는 희소성에 주목하는 기존의 뉴스 문법 그대로였다. 한국에서 여자 야구 선수들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때만 반짝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네들의 구체적인 삶이나 이후 행적은 기사화되지 않는다. 기사들에서 여자 야구 선수들은 하나의 점처럼 존재한다.
반면 이달 초 공개된 SBS 다큐멘터리 <미쳤대도 여자야구>는 이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시도다. 다큐 제목처럼 남자 프로야구리그(KBO)가 매년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오늘이지만, 야구하는 여자는 아직도 “미쳤다”는 소릴 듣는 것이 현실이다. <미쳤대도 여자야구>는 이 '미친 여자들', 김라경, 박주아, 김현아를 중심으로 국가대표 여자 야구 선수들의 분투를 그린다.
<미쳤구>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최초' 타이틀 건너 선수들의 구체적인 모습들과 맞닥뜨린다. 한국 리틀 야구 최초, 대학 리그 최초의 여자 선수였던 김라경은 '야구가 당연한 곳'으로 알고 찾아간 일본에서도 실상 야구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본 실업팀 세이부 라이온스 레이디스의 투수이자 어르신들의 재활을 돕는 접골원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다. '대학교 5학년생'인 김현아는 홈에서 2루까지 노 바운드로 송구하는 강한 어깨 덕에 최근 3루수에서 포수로 전향했다. <최강야구> 트라이아웃의 유일한 여자 참가자이기도 했던 박주아는 내·외야 모두에 파이팅을 불어넣는 전천후 유격수다. 기성 언론들이 이들에 '한국 여자 야구의 프론티어'로서의 막중한 사명감에 준하는 질문들, '여자 야구의 미래', '후배 선수들에게 한 마디' 같은 무거운 질문들만 던진다면 <미쳤구>는 없던 길도 만드는 개척자들 개개인의 서사에 주목한다.

<미쳤구>가 서사에 진심이라는 것은 내레이션을 영화 <야구소녀>(2020)의 주연 배우 이주영이 맡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에서 여성의 현실을 일깨우는데 큰 영향을 미쳤듯, 야구판에서의 여성을 비추는데 <야구소녀>가 끼친 공은 혁혁하다. 이주영은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보통 여자 투수들이 두 가지 구종을 갖고 있는데 반해 김라경은 포심에 체인지업, 커브까지 던진다고 알려준다. 이주영이 분했던 캐릭터 주수인이 실존 인물 안향미 선수를 모티브로 한국 야구판에 '왜 여자는 프로 선수가 될 수 없는지' 끊임없이 질문했다는 사실, '너클볼 투수' 주수인을 연기하기 위해 오랜 훈련을 마다치 않았던 이주영이 KBO의 시구자로 나서서도 마운드 한복판에서 포수의 미트에까지 정확히 꽂아 넣는 피칭을 선보였다는 걸 아는 이에게는 그 목소리에 남다른 울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카메라 앞에서 격의 없는 인터뷰이의 태도였다. WPBL 결과를 기다리며 선수들은 소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렇듯 격의를 허물기까지는 인터뷰이의 사정을 발견하고 사려 깊게 묻는 인터뷰어의 마음 씀씀이가 있다. 도준우 PD는 마운드에 뭔가를 그리는 김라경의 루틴을 포착하고는 “방금 뭐한 거예요?”라고 묻는다. 그것은 김라경이 '마운드의 신'에게 '웃어달라'며 보내는 '스마일'이다. “마운드의 신에게 한 마디 하라”는 도 PD의 말에 선수 생활 내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왔던 김라경은 말한다. “저 오랜만에 컴백했는데 도와주세요. 안 다치게.” 그는 곧 WPBL 정식 무대에서도 마운드에 예의 그 스마일을 그리게 된다.
3년 전 내가 만난 여성 야구인들에게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미트를 벌리고 쪼그려 앉아 투수 공을 기다리는 포수에게서는 마스크를 뚫는 결기가, 와인드업 후 공을 뿌리는 투수에게서는 '일구일혼'의 장인 정신이, T바에 놓인 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타격폼을 가다듬는 타자에게서는 투지가 느껴졌다. 훈련이 끝난 후 야구 장비들을 척척 정리해서 차 트렁크에 싣고, 엄마 따라 야구장에 놀러온 어린 딸을 번쩍 안아 드는 모습에서는 느껴지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생활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그걸 활자로 오롯이 전달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라고 낙담하던 찰나, <미쳤구>가 나와 반갑다. 그날 코치님(코치님도 여성이었다)의 딸은 3시간 내내 야구공을 만지고 놀았는데, 30년 넘게 야구와 거리가 멀었던 나와 그 아이의 삶은 180도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쳤구>를 보는 여성들의 삶도 그와 같기를, 그리하여 '미쳤다'는 말 대신 야구하는 여자가 당연한 그날이 오기를. 그리고 이미, 여정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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