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에서 시작된 지중해의 맛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1. 3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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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그리스 음식

호주 멜버른의 시내 론스데일 스트리트(Lonsdale St.)에는 그리스 거리가 있다. 주방이 쉬는 날이면 자주 그 거리를 걸었다. 밖에서 보면 별것 없는 것 같은데 안은 사정이 달랐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배가 나온 중년 남자들이 카운터를 지키며 조잡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를 놓은 식당들은 늘 붐볐다. 토마토와 치즈, 올리브 오일의 상큼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식당 안에는 푸짐한 음식들을 앞에 둔 사람들이 싸구려 화이트 와인을 시켜 놓고 시간을 보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외국인 노동자 신세에 그 거리는 또 다른 코리아타운 같았다. 그리스 음식이 지중해 식단이라며 건강한 음식 대접을 받지만 막상 내가 접한 것들은 넉넉한 시골밥 같은 것들이었다.

한국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뭘 먹는지 물어보면 대답 못 할 사람이 8할은 넘을 것이다. 그리스 음식의 알파요 오메가는 역시 올리브 오일이다. 전체 식단 중 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이 30~40% 가까이 되는데 모두 올리브유 덕분이다. 그럼 그것 말고는?

아랍의 향기와 유럽의 감성을 품은 그리스 음식을 알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은 서리풀터널 근처 ‘노스티모’다. 내방역 8번 출구를 나와 서리풀터널 쪽을 바라보니 건물 2층에 그리스 국기가 걸려 있었다. 식당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한적한 도로 한편이었다. 막상 계단을 올라 식당 문을 여니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국적인 식당이었지만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보다는 모임을 하는 중년 여자가 더 많았다. 아마 요식업에서 가장 까다로운 소비자를 꼽자면 바로 그녀들이다. 적정 가격에 대한 저항이 심하고 맛에 예민하며 분위기와 접객 모두 까다롭다. 그녀들이 모임을 한다면 멤버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2차 관문까지 뚫은 셈이다.

서울 방배동 ‘노스티모’의 무사카.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자리에 앉으니 축구 클럽팀이 연습 경기에서 부드럽게 공을 돌리듯 메뉴판이 펼쳐졌고 간단한 설명까지 이어졌다. 이름이 낯선 음식들을 어떤 조합으로 먹으면 좋을지 코칭을 받으며 메뉴판 공부가 끝났다. 시작은 포도잎에 쌀과 양고기를 다져 넣은 ‘돌마다키아’였다. 타 지방 사람들이 낙엽을 왜 먹느냐고 묻는다는 부산의 들깻잎처럼 왜 이런 것까지 먹을까 싶은 음식들은 보통 역사가 길다. 포도잎을 써서 만든 돌마다키아도 멀리는 13세기, 가깝게는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기원을 잡는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포도잎은 소금에 절여 실제 들깻잎 같은 질감이었다. 한입 씹으니 은근한 박하 향이 퍼졌고 다져 넣은 쌀과 양고기 때문에 순대를 먹는 듯했다. 바닷바람이 불 듯 짭조름한 맛에 실려 퍼지는 향기는 우리네 시골의 것과 분명 달랐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구운 ‘수블라키’와 피타 빵도 익숙하지만 어딘가 다른 풍경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페타치즈와 시금치를 넣은 삼각형 모양의 파이는 딜 등 허브를 다져 넣은 요거트 소스에 찍어 먹었다. 분명히 매일 먹는 시금치의 맛이 났다. 그러나 겉을 덮은 파이와 치즈와 요거트의 시큼하고 부드러운 유지방의 풍미가 그 맛을 유라시아 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지와 감자를 층층이 쌓고 소고기와 토마토로 만든 라구 소스, 그리고 우유와 버터, 밀가루를 끓여 만든 베샤멜 소스를 철근 사이에 콘크리트를 붓듯 넣어 만든 ‘무사카’가 나왔다. 그리스식 ‘라자냐’라고 쉽게 이야기하기도 하는 무사카는 밀가루 면을 쓰지 않고 가지와 감자 같은 채소를 쓴 덕분에 맛이 산뜻했다. 접시를 가득 채워 섭섭하지 않게 나오는 모양새는 호방한 느낌까지 들었다. 입안에서 풀리는 감각은 마치 여름 채소를 잔뜩 넣어 끓인 된장찌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재료가 가진 향과 맛이 싱그럽게 펼쳐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하고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는 미국에서 자란 그리스인 3세대였다.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한국과 일본처럼 사이가 나쁘지만 음식은 많이 닮았어요. 피스타치오가 들어가면 튀르키예, 호두가 들어가면 그리스 음식이에요”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바클라바’라는 페이스트리 파이를 먹었다. 그리고 호두와 꿀을 올린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파란 국기가 맑은 하늘 아래 조용히 펄럭였다. 한국의 겨울은 사납고 때로 흉포했지만 이 집으로 흘러드는 햇볕은 막을 수 없었다. 그 하얀 빛은 파란 바다와 높은 언덕이 가득한 대륙의 끝, 어느 올리브 나뭇가지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노스티모(방배동): 돌마다키아 1만8000원, 시금치 파이 1만9000원, 수블라키와 피타 2만5000원, 무사카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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