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일기]키의 유전학, 우리가 다투는 '10cm'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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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원한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은 165cm에서 성장이 멈춰가고 있었다.
아버지 178cm, 어머니 163cm인 부모는 "키는 유전이라기에 그저 믿고 지켜봤다"고 담담히 말했다.
유전은 성장의 출발선을 정해주지만, 결승선의 위치를 옮기는 것은 결국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이다.
그 10%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은 결국 유전자가 아니라, 아이의 성장판이 닫히기 전까지 부모가 쏟은 섬세한 관찰과 개입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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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 자녀를 둔 부모들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학업과 수면 시간 사이에서, 영양 섭취와 식습관 교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결정을 유보하며 내세우는 논거가 바로 ‘유전 결정론’이다. “부모가 작으니 어쩔 수 없다”거나 “유전자가 좋으니 알아서 크겠지”라는 식의 방관이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마주하는 진실은 이보다 훨씬 정교하고 냉혹하다.
냉정하게 짚어보자. 신체에 병적인 결함이 없다면, 현대의 영양 상태에서 대부분의 남학생은 유전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160cm 전후까지는 자란다. 소위 말하는 ‘유전적 기본값’은 생존과 직결된 최소한의 선을 보장한다. 우리가 진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지점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10~15cm’의 구간이다.
현재 우리나라 성인 남성의 평균 키는 약 174cm다. 165cm와 174cm의 차이는 불과 9cm, 전체 신장의 10%도 되지 않는 미미한 수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10%야말로 성장의 핵심이자 본질이다. 아이의 인생에서 이 10%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잠재력의 실현’ 여부를 결정하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평균을 상회하느냐 못 미치느냐, 자신이 가진 유전적 가능성을 100% 발현했느냐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는 유전이 아니라 ‘환경’이다.
환경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부터 아이의 골격을 설계한다. 영유아기의 영양 상태, 초등학교 시절의 활동량, 사춘기 직전의 체중 관리와 수면의 질은 아이의 뇌신경계와 내분비계에 쉴 새 없이 신호를 보낸다. 뇌 시상하부의 GnRH 박동 발생기가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성장판이 얼마나 오랫동안 열려 있을지는 유전자가 정한 스케줄이 아니라 환경이 보낸 신호들의 총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키는 유전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사실 “우리는 그 10cm의 가능성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유전은 성장의 출발선을 정해주지만, 결승선의 위치를 옮기는 것은 결국 부모가 만들어준 환경이다. 사춘기가 시작된 후 뒤늦게 진료실을 찾는 이들에게 유전은 때로 편리한 핑계가 되기도 하지만, 그 핑계 뒤에 숨겨진 것은 아이가 누릴 수 있었던 기회의 상실이다.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키가 유전인가 환경인가”라는 소모적인 논쟁 대신, “우리는 이 아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게 해주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유전은 바꿀 수 없지만, 환경은 부모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 그 10%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은 결국 유전자가 아니라, 아이의 성장판이 닫히기 전까지 부모가 쏟은 섬세한 관찰과 개입에서 나온다. 성장은 기다림의 미학이 아니라 치열한 관리의 산물이다. 유전이라는 기본값에 안주하기엔, 우리 아이들이 잃어버릴 수 있는 ‘10cm’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겁다.
이순용 (syle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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