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잘하면 되는 직업만 16년, 이젠 모두를 품는 법 배워요
병오년 말의 해…467승 기수에서 조교사로 ‘수퍼땅콩’ 김혜선

1000리를 질주한 적토마의 잔등처럼, 현장 중계석은 뜨거웠다. 지난 16일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제2경주(1300m). 결승선 100m 앞, 중위권의 5번 경주마 ‘그랑크뤼’가 속도를 올렸다. 막판 추입. 흐름은 단숨에 뒤집혔다. 1마신(말의 코 끝과 꼬리 끝의 길이) 차. 그랑크뤼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한 여성이 땅을 박차고 포효했다. 김혜선(38) 조교사였다. 기수로 수백 번 우승한 뒤 ‘조교사 김혜선’으로서 거둔 첫 승이자 부부 첫 합작승. 이날 그랑크뤼의 고삐를 쥔 기수는 다름 아닌 그의 남편 박재이(30)였다. 김 조교사는 “남편이 꼭 내게 첫 승을 안겨주고 싶다는 의지가 워낙 강했다”며 “부부라 더 부담됐는데, 생큐 여보”라며 웃었다. 김 조교사를 19일 부산 렛츠런파크에서 만났다. 병오년. 붉은 말이 내뿜는 도전과 열정의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Q : 조교사 데뷔 두 달 만의 첫 승 소감은.
A : “기대보다 빨랐다. 다만 기수 시절 성적이 있었던 만큼, 주변의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기수 남편, 초보 조교사에게 첫 승 선물
A : “완전 딴판이다. 기수는 홀로, 한 경기에 집중해 자신의 역량을 쏟아내면 된다. 하지만 조교사는 혼자서 안 된다. 마주와 마필 관리사, 기수와 조교사 등 정말 많은 사람이 각자 역할을 하며 하나의 말로 모인다. 그래서 조교사는 사람 관리가 중요하다. 마방의 감독이자 CEO다. 고삐처럼 조율해야 한다. 초반 한 달은 그걸 깨닫는 시간이었고, 제 고집을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교사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아직은 ‘기수가 더 편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번에도 많은 축하를 받았다. 기수로서 받았던 축하와 달라서 솔직히 어색했지만.”(웃음)
![김혜선 조교사는 경주마 글로벌히트와 함께 2024년 그랑프리(G1) 우승을 일궜다. 한국 여성 기수로는 최초였다. [사진 한국마사회]](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31/joongangsunday/20260131000322334ctjs.jpg)
Q : 은퇴와 조교사 전향. 왜, 언제 결심했나.
A : “이미 부상으로 큰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다. 무엇보다 남편도 기수이다 보니 가정과 아이를 생각해 겹치지 않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 박수받을 때 떠나는 게 맞다고 판단했고.”
Q : 만 20세에 기수로 데뷔했는데.
A : “오빠가 우연히 기수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야기를 해줬는데, 듣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키가 작았지만, 운동은 잘했다. 동물을 좋아했다. 말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기수 시험을 한 번만 보게 해 달라며 겨우 설득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A : “동기 기수들과 달리 난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시도 당했는데, 되레 장점이 됐다. ‘길들지 않았다’는 건데, 나쁜 습관이란 게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다. 남보다 50m 정도 뒤에서 늦게 시작한 대신, 기본부터 꼼꼼하게 몸에 익혔다. 말의 특성과 맞출 수 있는 강점이 생겼다.”

Q : 출산 이후 변화가 있었다면.
A :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말의 ‘지금’만 봤다면, 엄마가 되고 나선 말의 앞날을 보게 됐다. 이 훈련이 나중에 말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지, 3~4년 후엔 어떤 기량일지.”
Q : 큰 부상 뒤 복귀가 어렵지 않았나.
A : “솔직히 또 다칠까 겁난다. 그런데 경마는 1~2분 안에 승부가 난다. 그 찰나를 겁내서 놓치면 성적 자체가 안 나온다. 겁을 안고, 더 과감해졌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의 과감성은 2023년 코리안더비에서 드러났다. ‘엄마 기수’로 경주마 ‘글로벌히트’와 함께했다. 전환점이었다. G1급의 코리안더비는 3세 국산 경주마만 출전 가능하다. 경주마로선 생애 단 한 번 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르다. 글로벌히트는 출전한 16두의 경주마 중 베팅 선호도는 9위에 불과했는데, 김혜선이 우승했다. 이후 승승장구였다. 기수생활 중 우승한 13회의 대상경주 중 9번을 글로벌히트와 함께했다. 장거리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글로벌히트의 특성과 초반을 아끼고 말의 리듬을 끝까지 살리는 김혜선의 기승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그 호흡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이어졌다. 그리고 2025년 두바이 월드컵 카니발. 김 조교사는 당시 유일한 여성 기수였다.
히잡까지 준비해 ‘두바이 월드컵’ 출전
Q : 두바이 원정은 특히 상징적이었다.
A : “글로벌히트가 두바이에 가기로 먼저 결정됐다. 그런데 내가 주전 기수임에도 아랍 국가라 여성은 어려울 것이라는 말부터 퍼졌다. 히잡을 써야 한다는 말도 나왔고. 실제로 챙겨가기는 했다.(웃음) 그런데 마주가 ‘김혜선이 아니면 안 간다’고 해주셨다. 최종 3등이라는 성적도 의미 있었지만, 비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열어줬다는 점에서 ‘한국 경마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국가대표로 뛴 기분이었다.”
Q : 여성 기수라 부담되지는 않았나.
A :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여성 기수’라는 말보다 그냥 ‘기수 김혜선’으로 불리고 싶었다. 성별보다 결과로 말하고 싶었고, 큰 경기에 더 집착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Q : 글로벌히트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A : “최고의 말이자 동료였다. 솔직히, 글로벌히트 이전까지 난 스스로 ‘기회를 잘 못 잡는 기수’라고 생각해 왔다. 좋은 말과 합을 맞춰 좋은 성적을 내도, 정작 큰 경기를 앞두고는 남자 기수들의 차지가 됐다. 경마는 남자들의 세계였고, 늘 그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글로벌히트가 내게 주어졌다. 번번이 기회를 놓쳐 좌절하던 내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었다.”
Q : 말의 해다. 본인이 생각하는 말은.
A : “말(馬)은 동료지만, 말(言)이 없다. 그래서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외로운 동물이다. 교감할 무리나 대상이 없다면 일찍 죽는다. 공포심이 많다. 길들인다는 건, 공포심을 없애주는 거다. 눈과 목·귀만 봐도 안다. 흰자가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다면 경계 상태다. 부드러운 눈매라면 편안한 상태다. 목이 꼿꼿하면 긴장 상태다. 머리가 내 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나와 교감이 이뤄지고 있는 거다. 옆의 그랑크뤼를 봐라. 귀까지 내게 집중하고 있다. 말의 공포심이 순발력을, 외로움이 교감 능력을 키웠다. 역동성은 도전과 열정의 상징이 됐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아주 영민하고 예민한 동물이다. 현재 관리하는 말이 27마린데, 대부분 이전 조교사가 키웠다. 성향도, 사료 먹는 방식도, 훈련법도 모두 다르다.”
Q : 남편은 현역인데, 은퇴 아쉬움은 없나.
A : “(여덟 살 어린) 남편은 아직 한창때지 않나.(웃음) 나는 기수로서 정점까지 찍었다고 생각해 후회는 없다. 다만 너무 행복했기에 미련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Q : 조교사로서 첫해다. 목표가 있다면.
A : “사실 난 올해도 ‘준비하는 해’라고 생각한다. 0세, 1세, 2세…. 말들이 어떻게 크고, 어떤 말이 나중에 잘 뛰는지 그 데이터가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최소 2~3년은 시간을 두고 지켜볼 생각이다. 그래서 당장 잘될 거라는 기대보다는, 올해는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Q : 벌써 첫 승을 하지 않았나.
A : “부산·경남 경마장에 총 28개 마방이 있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드는 게 올해 목표다. 초보 기수이던 시절처럼 요행은 바라지 않는다. 부딪히면서 배워야 할 것들을 최대한 빨리 배우고 싶다.”
김 조교가 맡은 부산5조 마방은 ‘에퀴선’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말(Equi)과 태양이자 그의 이름인 선(Sun)을 합친 이름으로, 역동성과 따뜻한 리더십의 포부를 담았단다. 말 위에서 내려온 뒤에도 김혜선의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길고 느린 레이스의 출발선에 서 있다. 기수로서 남보다 50m 뒤에서 시작했듯, ‘조교사 김혜선’의 시간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다. 글로벌히트와 그랑크뤼처럼, 땅을 박차고.
부산=허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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