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담배 안 했는데 간경화”…50대 가장 덮친 침묵의 질환 [메디컬 인사이드]
B형 간염, 치명적인 간암 원인의 61% 차지
백신 도입 이전 세대, 관리 사각지대로 남아
간암 고위험군, 40세 이후 정기 검진 필수
신약 임상 속도 내며 완치 기대감 높아져

“술은 체질에 안 맞아서 못 하고, 담배는 직장 선배가 폐암 진단을 받은 걸 보고 완전히 끊은지 20년 가까이 됩니다. 야식은 커녕 간식도 일절 안 먹는데 간경화라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50대 직장인 서경제(가명) 씨는 몸이 피곤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가 간경화 초기 단계라는 진단을 받았다. 173cm의 키에 몸무게는 평생 65kg을 넘긴 적이 없고, 술·담배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터라 충격이 컸다. 별다른 증상이 없다 보니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B형 간염 바이러스가 간세포에 침입하면 면역반응 과정에서 간 손상을 일으킨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우리 몸 속 면역체계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면 6개월 이내 급성 간염을 앓고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감염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만성 B형 간염으로 분류된다. 급성 감염 환자의 약 5~10%가 만성으로 진행된다고 알려졌다. 만성 B형 간염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간경변이나 간세포암으로 이어질 위험이 증가한다. 만성 B형간염 환자의 간경변 5년 누적 발생률은 23%였다. 국내 간암 원인의 약 61%는 B형 간염이, 15%는 C형 간염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간암 사망률이 인구 10만 명당 19.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어서 더욱 경각심이 필요하다.
문제는 감염이 만성화된 이후에도 대부분 뚜렷한 증상이 없다는 점이다. 무력감이나 권태감, 소화불량, 우상복부 불쾌감 등의 증상이 나타나도 일상적인 피로감으로 치부해 진단 및 치료 시기를 놓치기 쉽다. 상당수 환자가 건강검진이나 헌혈 과정에서 우연히 진단받다 보니 ‘침묵의 질환’으로 불린다. 안상훈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국내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3~4%가 B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로 추정되며 실제 만성 간염 환자는 40만 명에 달한다”며 “그럼에도 자신의 감염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비율은 약 2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B형 간염은 백신을 통해 효과적으로 예방이 가능한 질환이다. 한국은 1995년 국가예방접종사업 도입 효과를 톡톡히 봤다. 90년대 초반까지 8.0%를 상회했던 B형 간염 표면항원(HBsAg) 양성률은 2020년대 들어 2.0%대로 떨어졌다. 현재 국내에서는 신생아를 대상으로 출생 직후, 생후 1개월, 생후 6개월 등 총 3회에 걸쳐 B형 간염 백신 접종을 시행하고 있다. 접종 비용은 정부가 전액 지원한다. 그런데 백신 도입 전후 세대의 B형 간염 표면항원 양성률은 극명하게 갈린다. 2021년 기준 B형 간염 표면항원 양성률은 40대 3.9%, 50대 5.7%로 0.0~0.2% 수준인 10대와 편차가 컸다. 남성의 경우 40대 4.8%, 50대 7.6%로 더 높은 수준을 나타냈다. 백신 도입 이전 세대가 사각지대로 남으면서 40대 이상에선 여전히 높은 유병률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안 교수는 “만성 B형 간염은 완치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며 “백신 이전 세대에서 형성된 높은 감염률이 장기간 유지되는 ‘코호트 효과’는 앞으로도 최소 30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산하 예방접종자문위원회가 ‘34년간 유지돼 온 신생아 B형 간염 보편 예방접종 권고를 폐기하고, 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있는 산모가 낳은 신생아에게만 접종을 권고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국내 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낸 것도 이러한 역학적 환경 차이에 기인한다. 안 교수는 “미국의 B형 간염 보유자는 전체 인구의 1% 미만인 반면 국내는 3% 이상으로 역학적 상황이 다르다”며 “국내에서 신생아 보편 접종 권고를 폐기할 경우 감염이 다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최근 B형 간염 유병률이 높은 국가로부터의 외국인 유입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국내 유병률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선제적인 대비가 필요하다고 봤다. B형 간염은 개인의 건강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에도 큰 부담을 안긴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B형 간염 관련 총 의료비는 2002년 1410억 원에서 2015년 5097억 원으로 10여년새 3.6배 뛰었다. 질병 단계별 연간 치료 비용은 만성 B형 간염 192만 원, 비대상성 간경변증 992만 원, 간암 2073만 원으로,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B형 간염은 아직 치료제만으로 완치를 기대하긴 어렵다. 만성 B형 간염은 일정 기간 약물치료를 진행한 후 최소 24주간 B형 간염 바이러스 표면항원이 소실되고 관련 DNA가 검출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될 때 ‘기능적 완치’로 간주한다. 현재 사용 중인 항바이러스제는 B형 간염 바이러스의 DNA 합성을 방해해 증식을 억제할 뿐, 간세포 내에 남아있는 cccDNA(공유결합 고리형 DNA)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평생 약물치료를 지속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는 만성 B형간염의 기능적 완치를 목표로 한 다양한 신약들이 후기 임상 단계에 진입하며 질환 정복에 도전하고 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이달 초 만성 B형 간염 치료후보물질 베피로비르센(bepirovirsen)의 3상 임상에서 완치에 가까운 효과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기능적 완치율 등 세부 결과는 연내 학술대회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안 교수는 “간암 예방의 핵심은 정기 검진을 통한 조기 발견이다. 간염바이러스 보균자는 더욱 적극적인 관리와 치료가 필요하다”며 “향후 신약 임상이 성공을 거두고 치료 현장에 도입되면 B형 간염 완치율을 20%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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