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
세계 시민과 그 적들 (1) 각자도생

사랑의 빈 자리를 위해 존중이 발명되었다.
-레오 톨스토이(1828-1910)
톨스토이는 금수저의 숙명으로 피투되어, 굴곡진 운명을 기투했던 자유의지의 구도자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장이 펼쳐지던 시절, 그는 부유한 백작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국이 소멸되고 새로운 국가로 단조되던 용광로 속에서 인간 군상의 심연을 직면한다. 이 경험은 그를 문학의 정점에 선 대문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상가, 미래를 가꾸는 교육자로 이끌었다.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답은 사랑이었다. 빵이 가장 절실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외친 것은, 혼란의 시대에 들불처럼 번지는 혐오의 불길은 사랑만이 잠재운다는 것을 통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남녀의 불같은 사랑, 자식에 대한 일방적 사랑, 신을 갈구하는 사랑, 그리고 낯선 이에 관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편적 인간애의 시작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세계시민(cosmopolitan)을 선언하고 2300년이 흘러, 세계화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세기 세계를 양분한 냉전이 종식되고, 하나로 통합된 세계 자본 시장과 함께 문명의 새천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공동체 정신은 파열음과 함께 쩍쩍 갈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념의 균열에 혐오와 폭력이 스며든다. 국가들은 이웃의 땅을 차지하려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민족들은 자신이 끼친 피해에는 눈을 감고, 받은 피해만 강변한다. 수천년 전 원한을 갚는다며 무고한 어린이까지 죽음에 몰아넣는다. 젊은이는 노인을 멸시하고 노인은 젊은이를 비난한다. 남여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고 혐오가 스며들어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각자도생이 사방에서 메아리친다.

인류는 집단을 기반으로 진화하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집단을 지속시키는 공동체 정신은 미약한 육체의 현생 인류가 생존을 위해 품었던 최초의 이념이다. 공동체 정신은 이중적이다. 우리의 경계 넘는 순간 관대한 이타성은 호전적 이기성으로 전환된다. 집단 내부를 향한 응집력이 강할수록, 외부로는 호전적 배타성이 발산된다. 문명의 역사는 집단의 충돌과 융합을 거치며 우리의 경계가 확장된 과정이다. 개인으로 구성된 가족은, 상위 집단인 친족을 구성한다. 그리고 친족이 모여 부족을 구성한다. 이렇게 층위 구조를 형성하는 개인, 가족, 친족, 부족, 민족, 국가 등의 구성 요소를 홀론(holon)이라 한다. 이는 아서 쾨슬러가 ‘기계 속 유령’(Ghost in the machine)에서 소개한 개념으로, 전체(holos)이자 부분(on)인 요소를 의미한다. 홀론은 독립적 전체이면서 다른 홀론과 연결되어 더 큰 홀론을 구성한다. 홀론 계층은 일방적 지배-종속 관계가 아니며, 전체가 부분의 총합보다 커진다. 1+1=2가 아닌 1+1>2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휘되는 나보다 강한 우리의 힘으로, 현생 인류는 적자 생존이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유일무이한 단일 지배종으로 발돋움하였다.
홀론은 과학적 관점의 공동체 개념으로, 동물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동물은 동일한 유전정보를 가진 수많은 클론 세포의 집합체인 다세포 생물이다. 세포가 모여 있기만 하면 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물 세포는 분화를 통해 전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세포가 연결되어 조직을 구성하고, 조직은 장기를, 장기는 동물을 구성한다. 이 층위 구조의 세포, 조직, 장기, 동물이 모두 홀론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세포는 원소이자 기반 홀론이다. 홀론 구조를 통해 세포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세포 단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정교한 기능이 구현되는데, 이를 창발(emergence)이라 한다. 창발은 상호작용하는 홀론의 자기 조직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원소인 세포의 유전 정보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를 생물학 용어로 진화라고 한다.

생물의 개별 세포들은 공동 운명체
홀론의 관점에서 다세포 생물과 문명 집단을 비교하면, 세포는 개인, 대사-순환 시스템은 자본 시장으로 대응된다. 큰 차이점은 다세포 생물은 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지속되지만, 문명 집단은 공짜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소 홀론인 사람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집단 지속을 위해서는 우리라는 인식의 동기화가 필요하며, 이것이 발현되는 것이 공동체 이념이다. 홀론 구조가 안정화되면 구성 원소의 독자 생존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은 각자도생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각자도생과 이기적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세포 생물에서 홀론 구조와 연결을 끊어버리고 자기만 증식하는 세포 집단이 암이다. 암이 자라면 생물이 죽고 결국 암도 죽는다. 마찬가지로 문명에서 다른 집단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탐닉하는 것을 암적 존재라 한다.
집단은 개인 없이 성립할 수 없고 개인도 집단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 정신은 획일적 전체주의가 아니며, 개인주의와 이타주의 사이의 균형점이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집단의 관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개인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개념이다. 전체주의와 이기주의는 양극단에 놓여 있어 양립이 불가능하다. 반면 이타주의와 개인주의는 균형점에서 만날 수 있다. 이타주의는 개인의 생각이 집단으로, 개인주의는 집단의 생각이 개인으로 뻗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위 홀론 집단에서는 개인주의, 상위 홀론 집단에서는 이타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주의와 이타주의가 조화를 이룬 집단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고장도 빈번해지듯, 문명 진화의 최종장인 세계화에 필요한 공동체 정신이 안정화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각자도생은 상위 집단 창발에 실패하여 우리의 경계가 축소되는 현상이다. 이때 구성원마다 생각하는 후퇴선이 각양각색이면 문제가 생긴다. 누구는 국가, 누구는 민족, 누구는 가족까지 우리라고 여긴다. 우리의 경계가 제각각인 하위 집단이 늘어나면 혼란 발생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혼란은 하위 집단으로 계속 전파되어 개인까지 영향을 미친다.

인간 공동체 시험했던 코로나 팬데믹
지난 팬데믹은 경제만 세계화된 상황에서 국가별 각자도생을 시험한 모의고사였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연결을 테스트하는 자연 법칙의 시험관이었다. 신종 바이러스가 인간으로 건너온 것은, 첨단 문명도 자연 생태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행과 변이가 지겹게 반복된 것은, 세계는 이미 지구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류는 이미 공동 운명체로 엮인 것이다. 펜데믹은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던 세계화에 급제동을 걸었다. 거침없이 성장해온 관성이 큰 만큼 충격파도 컸다. 하지만 세계 시민의 공동체 정신은 충격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다. 세계화의 이익을 가장 많이 누린 선진국들은 상황이 악화되자, 탈세계화에 앞장서 인류 공동체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탈세계화 지렛대의 받침점에는 혐오가 괴여 있다. 혐오는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 무시에서 시작된다. 존중이 상호 연결의 시작이라면, 무시는 소통 단절의 시작이다. 단절은 상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이것이 혐오의 뿌리가 된다. 두뇌의 본질은 생존을 위해 진화된 정교한 확률 계산기다. 생태계에서 위험은 회피하고 먹이는 잡기 위해, 두뇌는 빠르게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 근거는 벌어질 사건에 대한 예측이며, 이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유전자는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었다. 우리가 이분법적 결과에 익숙한 것은, 도망이냐 싸움이냐 둘 중 하나를 끝없이 판단했던 두뇌 진화의 관성 때문이다.
위험으로 가득했던 포유류 진화 환경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유전자에 각인시켰다. 낯선 상황에 놓이면 두뇌의 감정 영역은 호르몬을 분비하여 공포 반응을 촉발시킨다. 이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응하기 위해 육체적 긴장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성 영역의 판단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성 영역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상황 파악이 어렵거나 정보가 없는 낯선 대상을 마주쳐 예측이 불가능한 경우다. 그럼 두뇌는 패닉에 빠진다. 이런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스트레스가 누적된다. 특히 구체적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은 혐오로 전사된다. 그러다 혐오가 역치를 넘어가면 폭력이 투사된다. 폭력은 불확실성에서 탈출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극단적 폭력도 불확실성에서 도피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 그 정도로 두뇌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인간 진화 역사에 각자도생은 없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은 호르몬 단백질의 복합 작용을 통해 발현된다. 불확실성이 닥치면 공포 감정이 행동을 주도한다. 이 공포의 길항 감정은 사랑이다. 동물의 유성생식이 가능해진 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일차원적 사랑의 감정은 유효기간이 짧다. 물불 안가리고 사랑만 갈구하는 유전자는 포식자에게 멸절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포유류는 지속적 모성애를 진화시켰다. 여기서 공동체 의식의 기반이 되는 섬세하고 포괄적인 공감이 진화하였다. 집단이 확장된다는 것은 낯선 대상과 계속 연결된다는 의미다. 집단의 이합집산이 활발했던 세계 각지 문명의 요람에서 보편적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들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집단을 융합시키는 것이 사랑이라면, 혐오의 나선을 멈추는 것은 존중이다. 인류 공동체 붕괴를 막기 위해 거창한 신념이나 각오까지는 필요없다. 다름에 대한 존중이면 충분하다. 세계 시민에게 다름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틀림이 아니다.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인종, 다른 지역,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모든 다름은 인류라는 우리의 경계로 포괄된다. 하지만 다름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사랑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것이 존중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상대도 고유한 자유의지를 가진 같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인류애의 발현이다. 세계 시민의 공동체 정신 회복을 위한 연결은 존중으로 시작된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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