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美장관·英총리 찾은 베이징 골목식당…접시 위의 '음식 외교'

한종구 2026. 1. 3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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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만찬 대신 골목 식탁…정상 외교의 또 다른 무대
종업원 "총리·수행원 모두 젓가락 사용 모습 인상적"
美장관·英총리 찾은 베이징 골목식당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29일 오후 중국 베이징 싼리툰 골목에 자리잡은 한 윈난 요리 전문 식당 모습. 이 식당은 2023년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에 이어 28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방문한 곳이다.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29일 오후 6시 30분께(한국시간 오후 7시 30분), 중국 베이징 번화가 싼리툰 골목에 자리한 윈난성 요리 전문 식당 '이쭤이왕'(一坐一忘)은 퇴근 시간대 인파로 북적였다.

식당 문을 열자 별도 칸막이나 귀빈용 별도 방 없이 트인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1층에는 2∼3명씩 둘러앉아 간단한 요리를 즐기는 손님들이, 2층에는 7∼8명씩 테이블을 채운 단체 손님들이 저마다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식당 벽면에는 병오년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날개 달린 말이 하늘로 비상하는 붉은색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언듯 평범해 보이는 이 골목 식당은 전날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다.

스타머 총리는 식당 2층 홀 테이블에 앉아 수행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칸막이 하나 없는 개방된 공간에서 중국 손님들과 나란히 앉아 식사를 즐긴 셈이다.

경호와 동선이 철저히 분리된 공식 만찬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이 식당은 이미 2023년 7월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방문하며 외교가의 주목을 받은 곳이다.

한 종업원은 "손님들은 '미국 재무장관이 왔던 식당'으로 기억한다"며 "이번에는 영국 총리까지 다녀갔다"고 말했다.

美장관·英총리 찾은 베이징 골목식당 내부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29일 오후 중국 베이징 싼리툰 골목에 자리잡은 한 윈난 요리 전문 식당 내부 모습. 이 식당은 2023년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에 이어 28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방문한 곳이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서너 개의 빈 테이블이 있었지만, 곧 만석이 됐다.

오후 7시가 넘자 식당 입구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줄을 섰다.

식당을 찾은 한 중국인 커플에게 전날 영국 총리가 이곳을 다녀간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이들은 "우리는 그제도 이 식당에 왔고 오늘 또 왔다"며 "우리가 영국 총리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따라온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 커플은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에 올라온 스타머 총리의 전날 저녁 식사 영상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즐거워했다.

세계 각국 취재진의 발길도 이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한 러시아 기자는 "미국과 영국 고위 인사들이 현지 식당을 찾아 현지 음식을 함께하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음식 외교처럼 느껴졌다"며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스타머 총리는 영국 총리로는 8년 만에 중국을 찾았다.

그는 방중 기간 베이징 시내 한 호텔에서 자국 경제사절단을 만나 이번 방문을 두고 "역사를 만들고 있다"며 양국 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공식 발언이 오간 회의장 밖에서 그의 행보는 골목 식당이라는 비공식 공간에서도 이어졌다.

중국 베이징 골목식당 찾은 영국 총리 [중국 소셜미디어 웨이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식당 종업원은 외국인 손님이 많은 이유를 묻자 입지를 꼽았다.

그는 "주변에 외국 대사관이 많아 외국인 손님이 자주 오는데, 주중 영국 대사도 단골 중 한 명"이라며 "윈난 요리는 담백하고 향이 강하지 않아 처음 중국 음식을 접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먹는다"고 설명했다.

스타머 총리가 전날 주문한 음식은 버섯, 소고기, 두부를 재료로 한 윈난식 요리들이었다.

또다른 종업원은 "총리가 젓가락을 사용해 직접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며 "수행원들도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식당 측은 스타머 총리가 먹은 요리를 바탕으로 세트 메뉴를 준비 중이다.

옐런 장관 방문 직후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의 재무장관이 주문했다고 해서 이름 붙인 '재신(財神) 세트'에 이은 또 하나의 외교 메뉴인 총리 세트가 탄생하게 된 셈이다.

중국 웨이보 공개된 영상과 사진에는 스타머 총리가 룸이 아닌 홀에서 다른 손님들과 나란히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담겼다.

美장관·英총리 방문한 베이징 골목식당 찾은 러시아 취재진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29일 오후 중국 베이징 싼리툰 골목에 자리잡은 한 윈난 요리 전문 식당 앞에서 러시아 취재진이 취재하고 있다. 이 식당은 2023년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에 이어 28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방문한 곳이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종업원과 손님들의 사진 촬영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손님들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외교가에서는 정상의 식당 방문을 단순한 개인 일정으로 보지 않는다.

공식 회담장 밖에서 현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장면은 긴장된 외교 메시지를 완화하고 상대국에 대한 친근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베이징의 한 골목 식당에서 차려진 소박한 식탁.

그 위에는 음식뿐 아니라 미묘한 외교적 신호도 함께 올랐다.

jk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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