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스틸러] 이웃과 반찬 나누던 호시절…꼬막 육즙처럼 사랑이 팡팡
쌍문동 한 골목 다섯 가족 이야기
이집 저집 찬 나누며 ‘모두가 식구’
꼬막 타령 남편에 한상 차린 밥상
서로 내주는 넉넉한 인심에 흐뭇
벌교 오일장 좌판엔 조개 무더기
부드러운 ‘새꼬막’ 쫄깃 ‘참꼬막’
탱글탱글 한점…바다가 한입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1988년. 올림픽 주제가가 울려퍼지며 세계가 하나 된 역사적인 해다. 냉전의 벽이 허물어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보고자 온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더랬다. 흰옷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장면에 뭉클해지고 대한민국이 종합 순위 4위를 기록하던 순간엔 함께 얼싸안았다.
누구든 잊지 못할 시절이라 이를 제목에 실은 드라마도 있으니 이는 바로 2015년 방영한 ‘응답하라 1988’이다. 1988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한 골목에서 복작이며 살아가는 다섯 가족의 이야기로, 정답던 나날을 세심하게 담아내 호평받았다.


그 시절엔 음식이 사랑의 언어였다. 드라마도 다섯 가족의 저녁 시간을 비추며 시작한다. 주인공 성덕선(혜리 분)의 엄마 이일화(이일화 분)가 먼저 반찬을 만들어 이웃집에 건네자 답례로 그 집의 찬이 돌아온다. 그렇게 정이 오가다보면 온 동네 밥상이 닮아가고 모두가 끈끈한 식구가 된다.
일화는 아기 새처럼 입 벌린 세 자녀와 든든한 남편 성동일(성동일 분)의 끼니를 챙기는 데도 정성을 쏟는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셋방에 살지만 밥상만큼은 늘 푸짐하다. 상추·깻잎이 수북이 담긴 접시를 보고 “아따, 우리가 무슨 염생이(염소) 새끼도 아니고 온통 풀 때기래?” 하는 동일의 타박을 듣지만 말이다.
극 중 동일이 유독 좋아하는 건 꼬막이다. 어머니의 장례 때도 상에 꼬막이 없다며 투정 부릴 정도다. 집에서도 “임자, 꼬막은 다 먹었는가”라며 “나는 꼬막 하나만 갖고도 밥 먹는 거 알잖냐”고 불평을 일삼는다. 결국 참다못한 일화가 “씻는 데도 한참 걸리고 삶아서 뚜껑 따고 일일이 양념도 올려야 하는데 말만 하면 뚝딱 나오는 줄 아느냐”며 성을 낸다. 거친 말투와 달리 얼굴엔 의외로 속상함이 스친다. 마음 같아선 매끼 푸짐하게 차려내고 싶지만 빠듯한 살림에 어디 그게 쉽던가.
그러다 일화의 못다 한 마음이 꼬막 육즙처럼 팡 터지기도 한다. 어느 저녁, 산더미처럼 쌓인 양념 꼬막장에 동일이 깜짝 놀라 소리친다.
“오메, 이 사람아! 벌교 꼬막 씨를 말린 건가? 아니면 꼬막하고 억하심정이 있는 건가?”
그간 덕선네를 옥죄던 빚보증이 정리되자 일화가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족히 10층은 돼보이는 높이에 실실 웃던 동일은 조심스레 한점 들어 살을 바른다. 그리고는 첫째 딸 성보라(류혜영 분)에게 먼저 건넨다. 좋아하는 음식을 넉넉히 내주는 기쁨과 이를 소중한 이에게 양보하는 다정이 이어지며 밥상머리엔 웃음꽃이 만개한다.
꼬막 앞에서 찌푸리거나 방실대는 동일의 얼굴을 보자니 그 맛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떠났다.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렸다는 꼬막의 고장, 전남 보성군 벌교읍으로.


벌교역에서 2분 정도 걸었을까. 오일장이 보인다. 엄동설한에도 기운찬 상인과 찬거리를 사러 온 손님이 실랑이를 벌인다. 떠들썩한 틈에서도 단숨에 시선을 빼앗는 게 있으니. 드라마에서 보던 ‘꼬막 산’이다. 좌판마다 쌓인 조개 무더기가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자 한 상인 이 “요즘 같이 찬바람 불 때 조개 속살이 가득 들어차 맛나다”며 “새꼬막·참꼬막 안 가리고 있으니 말만 하라”고 귀띔한다. 새꼬막은 껍데기에 털이 보송하며 식감이 부드러운 편이고, 참꼬막은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진한 바다향이 일품이란다.

싱싱한 갯것을 구경했으니 이제 맛볼 차례. 시장 인근엔 꼬막만으로 한상을 차려내는 식당이 즐비하다. 그중 18년째 자리를 지켜온 ‘거시기꼬막식당’을 찾았다. ‘꼬막 정식’을 주문하자 수라상 부럽지 않은 갯벌의 향연이 펼쳐진다. 별다른 양념 없이 휘리릭 삶아낸 통꼬막, 달곰새금한 초장에 통통한 살을 버무린 회무침, 달걀물 입혀 지글지글 구운 전, 바싹하게 튀겨낸 탕수, 포일에 싸 쫄깃하게 구워낸 구이에 상다리가 부러질 듯하다.

사장 최세연씨(62)는 “방금 삶은 통꼬막부터 먼저 먹는 것이 순서”라며 능숙하게 껍데기를 까 내민다. 탱글탱글한 살점을 한입에 쏙 넣는다. 짭조름하면서 배릿하고, 졸깃졸깃 씹을수록 달보드레해진다. 꿀떡 넘어간 게 아쉬워 껍데기에 남은 진한 육즙을 호록 마신다. 스무개 넘는 접시 사이로 젓가락이 오가다보니 금세 배가 찬다. 최씨는 “맛있는 걸 주고 싶어 고민하다보니 가짓수가 이만큼 늘었다”며 “사실 요리하는 모든 이의 마음이 아닐까”하고 웃는다.
세월은 흘렀어도 음식엔 여전히 사랑이 담긴다. 이번 겨울엔 온 가족이 반드르르 물기 도는 꼬막 앞에 둘러앉아 가장 통통한 한점을 옆사람에게 건네보는 건 어떨까. 음식이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하나로 이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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