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으로 전하는 조용한 위로

곽성일 기자 2026. 1. 2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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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이후의 시간을 담아낸 여섯 편의 단편, 한국 독자들과 다시 만나다
작고 연약한 감정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속과 치유
▲ 손모아장갑과가여움 표지

"사랑은 전쟁이 아니야.그냥 거기 있는 거라고."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단편집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으로 한국 독자들과 다시 만난다. 이 작품은 제58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수상작으로 '키친'이후 오랫동안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 세계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특히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어판은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에는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헬싱키, 로마, 홍콩, 타이베이, 가나자와, 하치조섬 등 서로 다른 도시가 배경이지만, 이야기의 출발점은 모두 같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이 일어난 뒤, 인물들은 그 상실을 끌어안은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죽음과 이별, 관계의 단절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주어지고, 소설은 그 이후의 시간을 조용히 따라간다.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제목에 담긴 두 단어,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이다. 바나나는 강인함이나 극복 서사 대신, 작고 연약한 감정의 움직임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인물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조금씩 선택해 나간다. 그 과정은 느리고 조심스럽지만,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각 단편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감정의 전환점을 발견한다. 오래된 반지, 낯선 도시에서 건네받은 말 한마디,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표정 같은 것들이 인물의 마음을 미세하게 움직인다. 이때 바나나가 보여주는 것은 상실을 지워내는 법이 아니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지만, 다른 감정들과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난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소설집에서 삶을 비관도 낙관도 아닌, '가능한 한 가운데'에 두려는 태도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인생은 불행과 행복이 맞서 싸우는 전쟁터가 아니라, 순간과 순간이 이어지는 흐름이라는 인식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인물들은 큰 결단보다 작은 조율을 택하고, 확신보다 여백을 남긴다.

이번 한국어판은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김난주가 옮겼다. 오랜 시간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번역해 온 그는 간결하지만 여운이 긴 작가의 문체를 한국어에서도 자연스럽게 살려냈다. 과도한 설명 없이도 감정의 결이 전해지는 이유다.

'손모아 장갑과 가여움'은 독자를 단번에 위로하는 책은 아니다. 읽고 난 뒤에도 삶이 갑자기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숨이 조금 편해졌다는 느낌이 남는다. 바나나가 말하듯 치유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세계를 오래 기다려온 독자에게도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나는 독자에게도 이 책은 조용한 입구가 된다. 작고 가여운 것들을 향한 연민이 결국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이 여섯 편의 단편은 낮은 목소리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