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함께 매장하면 좋을 것들

토지(土地) 많아 무엇해 나 죽은 후에
삼척광중일장지(三尺鑛中一場地) 넉넉하오니
의복(衣服) 많아 무엇해 나 떠나갈 때
수의(壽衣) 한 벌 관(棺) 한 개 족하지 않나
‘허사가’
토지는 있어야 한다. 많으면 더 좋다. 토지 없으면 배고프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집에 농토가 없었다. 5촌 당숙께서 일본제국주의 때 만주로 가시면서 두고 가신 두 마지기(400평) 빌려 짓고 있었다. 6·25 이후 북한 정치 때 토지개혁이 될까봐 그 당시 토지가 많았던 마을 분이 아버님더러 외상으로 사라고 해서 밭 네 마지기(800평)가 생겼는데, 옥토가 아니고 모래밭이었다. 장마가 지면 1년에 1∼3차례 물이 들어와 그나마 수확을 못 할 때가 많았다. 1960년 5촌 당숙께서 논 세 마지기(600평)를 지어 먹으라 하셔서 겨우 생활은 하고 있었으나 빚이 늘어나면서 추수하고 나서 빚을 갚고 나면 추수 끝나도 식량이 없다.
토지 많은 사람이 부러웠다. 어릴 적부터 굶주리면서 자랐다. 5·16 이후 박정희 정권 때 고리채(高利債) 정리하면서 겨우 굶주림을 면했다. 그 당시 돈이든 쌀이든 이자가 100%였다. 봄철에 쌀 한 가마 빌려다 먹으면 10월에 추수해서 두 가마로 갚아야 한다. 먼 친척 아저씨께 한 가마 빌려다 먹고, 그해 못 갚으니 그다음 해 4가마로 갚아야 하는데, 그해 못 갚으니 3년 후 여덟 가마로 갚았다고 아버지께서 수시로 말씀하셨다.
5·16 이후 고리채(高利債) 정리란 모든 빚이나 쌀을 정부에 신고하면 정부에서 책임지고 갚아준다. 채권자나 채무자나 신고하면 채권자는 정부에서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하고, 채무자는 7년 이내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 나누어 갚으면 된다는 제도였다. 이때 모든 채권자는 채무자들에게 있는 대로만 갚으라 한다. 그해 추수한 쌀 몇 가마 보여주고 모든 채권자를 불러놓고 있는 쌀 모두 나누어주었다. 약 3분의 1 정도로 모든 빚을 청산했다. 그때부터는 빚이 없으니, 생활이 나아지면서 땅도 사고 배고픈 생활을 면하게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16세였다.
이때 나는 집을 떠나 동광원에 찾아가서 폐결핵 환자들과 살면서 배고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원조물자를 주면서 밀가루 강냉이 가루를 선교사 통해서 얻어먹게 되었다. 폐결핵 환자 한 명당 밀가루든 강냉이 가루든 1개월에 10㎏씩 준다. 이 식량 가지고 한 달을 살아야 한다. 배를 채우려면 산나물 들나물 다 뜯어다 배를 채워야 한다. 그래도 이곳저곳 개간해서 농사를 지으면 어렵게 가을철 겨울철은 지냈지만, 봄이 되면 먹을 것이 없다.
그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군에 입대했다. 군에 입대하니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군화도 신을 수 있고, 통일화도 신을 수 있었다. 제대 후 또다시 결핵환자들과 살게 되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미국에서 오는 원조물자가 끊어졌다. 또다시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돼지도 길러보고 양 길러 젖을 짜서 배달도 했고, 닭도 길러 팔아보고 그렇게 살다 보니 우리나라에 폐결핵 환자들이 없어지면서 나도 해방되었다.
1976년까지 배고프게 살았다. 1980년부터는 장애인들과 살게 되었다. 이때 정부에서 빌려주는 농지구입 자금을 받아 땅을 사게 되었다. 4500평 또 2000평 또 1500평을 사고 나니, 배는 안 고프다. 이제는 돈이 없다. 그래도 땅이 있으니, 돈을 잘 빌려준다. 농협에서 빌려준다. 지금도 빚은 1억이 넘는다. 그래도 행복하다. 빚 못 갚으면 땅을 주면 된다. 나 죽으면 묻을 산 마련해 두었다. 내가 누울 자리는 가로 3척 세로 8척은 되어야 하지만, 주위에 땅이 조금 있어야 한다. 삼척광중일장지(三尺鑛中 一場地), 넉넉 또 넉넉하다.
의복 많으면 따뜻하다. 의복 없으면 춥다. 옷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또 옷이 없으면 혼자서는 살 수 있어도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는 살 수 없다. 만약 옷이 없이 밖에 나간다면 당장 끌려가고 강제로 옷을 입게 할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옷이 귀해서 여름철에는 어린아이들이 옷 없이 벗고 자랐다. 아마 다섯 살까지는 그런대로 벗고 자랐던 것으로 생각한다.
농토가 있으면 논에는 벼를 심는 것이 원칙이었고 밭에는 채소나 곡식보다도 언제나 목화와 대마를 심어야 한다. 목화가 있어야 길쌈해서 식구들이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화로 길쌈해서 옷을 입게 되면 옷 한 벌 가지고 1년을 입을 수 없다. 20일이 지나면 헤지기 시작해서 30일이 지나면서부터는 구멍이 난다. 지금처럼 옷이 많아 이 옷, 저 옷 입을 수 없기에 그렇다. 대마는 그해 여름에 입고 다음 해까지 입을 수는 있다. 그것은 삼베옷을 입을 수 있는 계절이 7월과 8월뿐이기 때문에 2년을 입는다고 해도 겨우 4개월을 입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1년 중 10개월은 목화를 가지고 길쌈해 지은 무명옷을 입게 된다. 무명옷도 가장 추운 3개월 정도는 목화솜을 넣어 입어야 한다.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옷감이 목화였다.
부잣집에는 명주가 있었으나 그것은 고급 옷감이라 가난한 사람들은 갖기가 어려웠다. 내가 명주를 입어본 것은 어릴 적에 설날 저고리를 한번 입어본 것뿐이었다. 명주를 입기 위해서는 누에를 길러야 한다. 누에를 기르려면 뽕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평야에서는 그 흔한 자생 뽕이 없었다. 여유 있는 집에서는 집 주위에 뽕나무를 심었다. 웃기기 위해서 지어낸 속담 중에, 명주는 옷고름만 달고 다녀도 4촌까지 따뜻하다는 말이 있었다.
옷감은 입을 수만 있다면 천연 직류를 입어야 한다. 즉, 사람이 직접 먹어도 병이 나지 않는 재료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목화는 먹을 수 있다. 목화가 처음 열렸을 때 다래라고 하는데 어릴 적에는 즐겨 먹었다. 여름부터는 따 먹으면 안 된다. 다래가 커서 여물면 목화가 되기 때문에 목화가 어릴 적에 따 먹으면 안 된다. 또 다 익어 씨가 여물고 목화가 피면 그때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서리가 내리면 목화 잎이 시들고 미처 익지 않은 목화 열매를 다래라고 한다. 이때 연한 목화 열매를 따 먹으면 맛이 있다. 실은 익기 전 여름철이 더 맛이 있는데 그것은 먹으면 안 된다. 익혀서 목화를 갖고 솜도 만들고 길쌈해서 옷감도 만들어야 하기에 미리 따먹으면 안 된다.

서민들 여름 옷감은 삼베다. 삼베를 짜기 위해서는 삼을 심어야 한다. 삼이란 인삼과 혼동하기 쉬우나 다르다. 이파리는 비슷하지만, 삼은 열대식물로서 키가 1~3m 정도로 크고 1년생 식물이다. 아니 4개월이면 열매가 맺고 죽는다. 약초로 쓰이는 삼(蔘)은 다년생 식물이다. 삼을 마(痲)라고도 하지만 또 넝쿨로 된 마가 있어서 구분 짓기 위해 대마(大麻)라고 한다. 삼잎은 자주 나는 병에 달여 먹기도 했다. 삼은 2m 정도 자랄 때 꽃이 피기 전 잘라서 단으로 묶는다. 단째로 익혀서 껍질을 벗긴다. 처음에는 구덩이에 넣고 위에서 모닥불을 피워 익혀서 껍질을 벗겼는데, 조금 발달해서 철판으로 2m 되는 솥을 만들어 거기에 삶아 껍질을 벗기게 되었다. 껍질은 질겨서 어부들이나 배 타는 이들이 밧줄로 썼다. 삼베는 질겨서 돛대로도 사용했다. 삼베 색깔이 황색에 가까워 황포돛대라고도 했다. 삼은 습기가 있으면 질겨진다. 짚신을 삼을 때 주로 바닥에 삼을 넣어 삼으면 질겨서 좋은데 물을 묻혀 신으면 더 오래 신을 수도 있다.
모시로도 삼처럼 옷을 해 입었으나 모시는 주로 충청도 일부에서만 잘 되기에 비싼 옷감이었다. 모시 잎도 먹을 수 있는데 모시송편은 다른 송편보다 값이 비싸다. 가죽도 먹을 수 있는 가죽이고 양털 또한 실을 뽑아 옷 지어 입고 다니는데, 먹을 수도 있고 병도 나지 않는다. 다만 맛이 없어 먹을 만한 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석유제품이 등장하면서 나일론이 처음 나왔다. 윳이라는 고급 옷감이었는데, 윳동(뉴똥)은 천연 털이었고 석유제품으로 만들어낸 인조 윳동이 고급 옷감이었다. 그때부터 인조견이 발전해서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석유제품 옷들이 목화 흉내도 내고 삼베처럼 짜낸다. 실 한 오라기 한 오라기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기도 한다. 상복이나 죽은 사람이 입고 가는 수의마저도 가짜삼베가 차지하고 말았다.
석유제품이 양털처럼 만들어내기도 하고 솜처럼 만들어낸 솜이 카시미론(Cashmilon)이다. 가죽도 진짜처럼 만들어내면서 허리띠와 신발까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석유제품으로 만들어낸 실과 목화실을 섞어서 지어낸 옷은 면직류와 거의 구분이 안 되면서 질기기는 더 질기다. 옥양목에도 섞여 있고 광목에도 섞여 있다. 이제는 100% 면직류는 없다고 해도 보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수의(壽衣) 한 벌
수의는 삼베로 해서 입는다. 서민들은 비녀도 빼고 버드나무 가지를 꽂는다. 빨리 썩으라고 그렇게 입관한다. 내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염해서 입관하고 장례를 치렀다. 65년 전이다. 할머니의 손윗동서, 바로 내 큰할머니셨다. 이장할 때 보니, 원삼과 족두리를 쓰고 입관하셨다. 그 원삼과 족두리는 큰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입고 혼례를 치렀고, 잘 보관하셨다가 환갑 때 입으시고 대례를 지내셨고, 회연(결혼 60주년) 때 입고 춤추셨고, 임종 때 수의로 입고 입관하신 것이다.
양반들은 명주로 된 원삼을 입혀서 입관하였다. 옛 무덤을 발굴하면 장군들의 묘는 갑옷과 창 투구 칼까지 넣고 입관했다. 벼슬아치들은 평소에 입고 있던 관복을 입고 입관하였다. 양반들은 평소에 입던 두루마기 도포 망건 탕건 갓까지 씌워 입관하고, 서민들은 평소에 입어보지도 않았던 삼베로 입을 수도 없이 크게 굵은 실로 큰 바늘로 듬성듬성 지어서 입관해 왔다.
50여 년 전이었다. 숙명여대 의상학과 교수들이 40년 전에 서민들이 입던 옷을 구하러 찾아왔다. 서민들이 입던 옷 모양도 알 수 없단다. 양반들은 무덤을 파면 나오지만, 서민들은 무덤을 파도 그때 입었던 옷이 아니었다. 가끔 고려 때 고분을 파서 서민들 옷이 나와 그 모양을 전시하고 있으나 고려 때 역시 그 당시 서민의 옷이 아니다. 그 옷 입고 일하기 어려운 옷들이다. 이때 나는 느꼈다. 나는 앞으로 내 가족들은 절대로 수의 따로 만들지 않고, 평소에 아껴 입었던 옷으로 염하기로 했다. 내 아버지도 그렇게 했고, 형님 형수님도 그렇게 했다. 나 또한 그렇게 하련다. 평소에 새옷을 안 입었으나 환갑 지나 딸 결혼 때 사돈집에서 해준 한복과 두루마기가 있다. 그날 딸들에게 “너희들 이제는 아버지 옷 따로 마련하지 말고, 이 옷 명절 때마다 행사 때마다 입으련다. 나 죽거든 수의 따로 마련하지 말고 이 옷 입고 입관하도록 하라”고 했다. 우리 모두 수의 한 벌 준비하지 말고 아꼈던 옷 입고 입관하기 운동하자. 장례식장에서 보기도 흉한 수의 비싼 것 싼 것 찾지 말고 아껴 입던 고운 옷 입고 입관하면 돈 절약하고 아름다운 장례식이 되겠다. 미리 지어 놓은 수의도 입지 말고 좋은 옷 입고, 그 수의는 버리든 그냥 관에 넣고 장례 치르자.
관 한 개
관은 한 사람에 한 개씩이다. 옛 고관들은 외관 내관 쓰기도 했다. 나는 전라도가 고향이라서 어릴 적부터 매장할 때 관째로 매장한 것만 보고 자랐다. 경기도에 살 때부터 장례식을 하며 탈관하는 것을 보았다. 강원도에서도 탈관한다. 그때 생각해 보니, 전라도는 옛 백제 땅이었고, 경기 강원도는 옛 고구려 땅이었다. 고구려 풍습과 신라 백제 풍습이 다른 것 같다. 이 역시 서민들은 탈관하고, 벼슬아치들의 무덤을 파보면 관째 묻혀있다. 이 역시 양반들에게 속은 것이다. 나는 어디서 장례를 치르건 내가 주관한 장례식은 관을 빼지 않고 그대로 하관을 했다. 또 평소에 아끼던 금붙이도 넣어서 입관했다. 시계나 반지 안경 귀걸이 목걸이 팔찌 다 넣어서 입관했다. 옛날 같으면 밥그릇 국그릇 수저 모두 넣어서 입관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몇백 년 후, 후손들이 무덤 파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300년 전, 500년 전에 이런 장식 하였고, 이런 그릇 쓰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임락경 목사(정읍 사랑방 교회)
*이 시리즈는 순천 사랑어린마을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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