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단종과 박지훈의 재발견 [리뷰]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 도전 의미
단종 유배 이후 광천골 촌장과 우정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0240ljka.jpg)
※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나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세상에 나오자마자 원손(세자의 적장자)이 돼 평생을 군자의 도를 익히며 살았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왕위에 올랐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2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숙부의 배신으로 왕위에서 밀려나 궁이 아닌 유배지에서 여생을 보낸다. 단 한 번도 자기 뜻대로 살아내지 못한, 권력의 화마에 휩쓸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어린 왕. 역사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의 희생양이자 비운의 왕으로 기억하는 그 이름, 단종 이홍위다.
내달 4일 개봉하는 영화 ‘왕이 사는 남자’는 조선의 6대 왕 단종의 폐위 이후를 다룬다. 단종을 주인공으로 한 첫 영화다. 조선 초기 강원도 청령포 광천골에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와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라이터를 켜라’(2002), ‘기억의 밤’(2017), ‘리바운드’(2023)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시리즈 ‘약한 영웅’의 박지훈이 이홍위를, 유해진이 보수주인(유배형을 받은 죄인의 거처를 제공하고 감시하는 자) 엄흥도를 분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0547wftd.jpg)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0850vehe.jpg)
영화는 한양과 광천골의 서로 다른 분위기를 비추며 시작한다. 반란이 덮친 한양은 피로 물든다. 수양대군의 칼날에 단종을 보위했던 충신들의 목이 잘려 나간다. 신하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권신 한명회(유지태 분)의 선을 넘는 도발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홍위. 그의 눈에선 삶에 대한 의지마저 희미해져 간다.
반면 깊은 강원도 산골마을에는 먹지도 못하는 권력 대신, 배부른 한 끼가 간절한 이들이 있다.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이다. 엄흥도는 옆 마을 노루골이 양반들의 유배지가 된 이후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됐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는다. 쌀밥과 고기가 넘쳐나는 노루골 촌장네 잔치를 목격한 그는 광천골도 유배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발보다 말이 빠른 촌장의 미덥지 않은 제안에도 마을 사람들은 적객을 맞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엄흥도는 광천골을 찾은 이들이 다시 한양의 부름을 받고, 이후 마을에 넘치는 보은을 할 것이란 꿈 같은 상상에 빠진다. 긴 수염의 권세가가 올 것이란 기대와 달리 광천골의 땅을 밟은 것은 너무도 어린 소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이홍위다.
삶의 의지를 잃은 채 텅 비어버린 이홍위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는다. 하지만 엄흥도의 아들 태산(김민 분)을 비롯한 광천골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과 관심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엄흥도 역시 이홍위와 가까워지며, 조금씩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의로운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달라진 이홍위의 눈빛을 알아챈 한명회는 점차 그와 광천골 사람들의 목을 조인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1165ldqt.jpg)
영화는 단종의 죽음이라는 역사가 기록한 비극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그럼에도 단지 비극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단종 이홍위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떤 결심을 했을지, 더 나아가 단종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령 산에서 호랑이를 만난 이홍위가 광천골 사람들 뒤에 숨지 않고, 직접 활을 들어 호랑이와 대적하는 신은 ‘백성을 먼저 위하는 성군’으로서 단종이란 인물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일지언정, ‘의(義)’를 위해 행동하기로 마음먹는 이홍위의 모습도 그렇다. 누구보다 성군의 자질을 가졌던 강인했던 왕. 선왕과 보수주인의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과 함께 감독이 관객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지점은 이 부분이다.
장항준 감독은 최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단종을 기존에 알려진 대로 나약한 이미지로만 그릴 거면 굳이 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면서 “모두가 세조가 나쁘고, 단종이 불쌍하다고 하는데, 그런 가치가 있는 성군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1708ohtm.jpg)
영화는 실제 사료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멸족의 위협에도 목숨을 걸고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뒀다는 몇 줄의 기록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유배지에서 단종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정사와 야사의 기록을 이어 붙이고,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우며 2시간 분량의 서사를 완성했다.
사실과 허구가 만나며 생긴 빈틈을 완벽히 메우는 것은 배우들의 섬세하고 강렬한 연기다. ‘왕의 남자’(2005),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올빼미’(2022) 등 유독 사극과 좋은 궁합을 보여준 유해진은 이번에도 엄흥도 그 자체가 돼 작품을 누빈다. 영화에 간간이 나오는 웃음은 모두 유해진의 솜씨다. 살기 위해 모셨던 적객에게 존경심과 연민, 나아가 부모로서 마음을 느끼는 엄흥도의 감정 변화는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가는 축이다.
유해진은 “엄흥도란 훌륭한 인물에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요소를 주는 것을 고민했다. 후반부에 무거운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에 앞부분까지 무겁게 갈 수는 없었다”면서 “단종이 마지막 부탁을 할 때, 엄흥도는 자식 같아 얼굴 한번 만져주고 싶지만 용안이라서 만지지 못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기한 나도, 박지훈 배우도 그 신에서 엄청 울었다”고 밝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ned/20260129160041985hiuo.jpg)
무엇보다 단종을 분한 박지훈의 연기력이 빛난다. 역사가 그저 약하게만 기억해 온 단종은 박지훈을 통해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하고, 심려 깊고 단단했던 왕으로 재조명된다. 힘을 잃은 눈빛이 점차 생기를 되찾고, 결국엔 강한 의지의 결정체로 거듭나는 모습이 인상 깊다. 폐위 후 단종의 피폐함을 표현하기 위해 두 달 만에 15kg을 감량하며 배역을 준비했단다. 단종의 재발견임과 동시에 배우 박지훈의 재발견이다.
박지훈은 “슬픔의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단절되고 무기력한 감정, 그냥 슬픔이 아닌 완전히 낭떠러지에 있는 듯한 깊은 슬픔을 표현하려 노력했다”면서 “피폐한 것을 넘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단종을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하면서는 물도 최대한 안 마시면서 목소리까지 버석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끝은 비극이지만, 그 가운데는 의를 위한 굳은 의지와 처절한 몸부림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가 남긴 승자의 기록들에 대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져도 되는가. 짙은 감동으로 뭉쳐진 역사의 한 조각이 던진 물음표가 묵직하고, 시리다.
“성공한 불의는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고,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후대가 손가락질할 자격이 있나. 실패한 ‘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할지 생각해 본다면, 무엇보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장항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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