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로 운 좋은 사내의 말로
[이진순의 지남철]
[미디어오늘 이진순 성공회대 겸임교수]

한덕수 전 총리는 억수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다. 서울대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이른바 '소년급제'를 했고, 상과대학 수석 졸업으로 대법원장상을 받았으며, 하버드대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엘리트 관료로 잔뼈가 굵었고, 김대중 정부에선 초대 통상교섭본부장, 노무현 정부에선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 이명박 정부에선 주미대사, 그리고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재운도 뛰어났다. 주미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떠난 뒤 국무총리로 다시 발탁되기까지 10년 동안 재산을 40억 원이나 늘렸다. 무역협회 회장으로 23억 원,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18억 원을 벌었다. 2022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이해 충돌 논란이 일었으나 그는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한덕수의 마지막 행운은 지난해 8월, 윤석열 계엄을 방조한 혐의로 청구된 구속영장의 기각이었다. 법원은 혐의내용에 다툼의 여지가 있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처세와 운세의 완벽한 조화로 또 한 번 용케 위기를 넘기는가 싶었다.

그러던 한덕수가 지난 21일 내란중요임무종사·허위공문서작성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23년 징역형으로 법정 구속되었다. 담당 재판부는 12·3계엄을 '위로부터의 내란'으로 규정하고 “위로부터의 내란 위험성의 정도는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준엄하게 질책했다. 한덕수는 그 말을 이해했을까? “재판 결과를 겸허히 따르겠다”던 그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억수로 운 좋은 사내가 한 명 더 있다. 2024년 2월 KBS 박장범 앵커는 윤석열 대통령실을 방문해 단독대담을 진행했다. 김건희의 디올백 뇌물수수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시점이었다. 박장범은 이 대담으로 '파우치 박'이라는 치욕적 별명을 얻었으나 그 인연을 무기로 KBS 사장에 오를 수 있었다. 윤석열이 임명한 이진숙과 김태규 2인 체제로 운영되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본래 정원은 5명) 면접도 없이 KBS 이사들을 졸속 선임했고, 그 이사들이 '시민참여 사장평가제도'도 생략한 채 박장범을 사장 후보로 전폭 추대했기 때문이다.
박장범이 대통령 임명을 받아 공식 취임한 날은 계엄 일주일 후인 12월10일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비상계엄 사태로 민주주의 질서와 헌법 가치가 위협받는 국정 혼란 상황에서” 공정 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공언했다. 과연 처세의 달인다웠다. 앵커로 복귀한 지 석 달 만에 대통령 단독대담의 기회를 잡고 '자그마한 파우치백'으로 대통령을 흡족하게 한 덕에 KBS 사장에 오르고 계엄 실패의 직접적 화살까지 절묘하게 비켜 간 것은 박장범의 기막힌 시운과 처세술 덕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엄 당일 박장범이 KBS 보도국장에게 모종의 전화 지시를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그의 운도 파국을 맞고 있다. 기자들에게 정부 담화일정이 알려진 게 그날 밤 9시 18분인데, 그보다 앞서 8시경 최재현 보도국장은 퇴근했다가 다시 돌아와 뉴스 부조정실에 특별보도 전환을 예고하고 준비시켰다. 잠시 후인 8시56분 윤석열은 국무위원들에게 “22시에 KBS 생방송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 KBS에 계엄선포 방송을 사전에 준비시키고 확인까지 한 후에 다시 윤석열에게 보고했다는 이야기다. 그 '누군가'가 바로 박장범이다.

지난 26일 언론노조 KBS본부는 당시 최재현 국장에게 전화 지시를 한 사람이 박장범으로 드러났다고 밝혔고, MBC는 취재를 통해 박장범과 사전에 소통한 라인이 최재혁 당시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KBS 사장은 박민이었고 박장범은 사장 내정자로 편성과 보도에 관여할 아무 권한이 없는 위치였다. 윤석열의 직통라인으로 박장범이 계엄 정황을 사전에 인지하고 동조했으며, 부당하게 방송편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방송법 위반은 물론 내란 중요임무종사, 내란 선전·선동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이미 지난 22일 서울행정법원은 방통위 2인 체제에서 선임된 KBS 이사들의 지위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면 위법하게 임명된 이사들에 의해 추대된 박장범 사장의 지위도 무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추가 증거가 확보된 만큼 경찰은 박장범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고 공영방송을 내란의 도구로 삼으려 한 의혹에 대해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한덕수가 그랬듯 박장범의 화려한 비상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억수로 운 좋은 사내들이 그 운을 개인의 영달과 입신을 위해서만 쓰려고 할 때 어떤 결말을 맡는지, 국민의 뜻인 천명을 거스를 때 어떻게 되는지, 역사의 선명한 본보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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