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 '새내기'의 클라이머 되기 프로젝트 [5.11이 보인다]
암벽등반을 시작한지 1년 반, 등반을 잘 하고 싶어졌다. 더 어려운 바위를 오르고 더 재미있게 등반하고 싶어졌다. 훈련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선배 등반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암장을 등록해 실력을 키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로 했다.
[5.11이 보인다] 연재는 월간산 정유진 기자의 암벽등반 훈련기다.
(연재 제목 속의 5.11은 암벽등반 난이도다. 태권도로 치면 빨간띠 정도다.) _편집자 주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네가 클라이머라고 생각하니?"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그러자 그가 비웃었다.
"5.11도 못 하면서 무슨 클라이머야?"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클라이밍을 하면 클라이머지!' 속으로 생각하며 툴툴거렸다.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 동경의 마음이 피어났다. 친구가 말한 진정한 클라이머의 세계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거친 손과 강철 어깨, 무뚝뚝한 표정을 동경했다. 그리고 5.11을 하면 적어도 등반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등반 실력을 키워 당당하게 클라이머라고 불리고 싶었다.
이 대화를 시작으로 나는 훈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에 더해진 수많은 이유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등반을 잘하고 싶은 이유'에 대한 대답은 '재미있어서'이기 때문이다.
![월간산 1986년 1월호 [암벽등반의 새물결 '하드프리'란 무엇인가] 中 도봉산 코너크랙을 리드하는 윤대표(좌)와 남측오버행 1피치를 리드하는 윤대표(우). 두 루트 모두 대표적인 자유등반 루트로 당시 5.11급 난이도가 매겨졌다.](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9/san/20260129075217395kqhq.jpg)
5.11이라는 숫자
5.11은 날짜가 아니다. 암벽등반 난이도다. 태권도에서 숙련도에 따라 하얀띠, 노란띠, 빨간띠, 검은띠로 등급을 나누듯이 암벽등반에서도 난이도에 따른 등급이 있다. 등급은 5.8(초급), 5.10(중급), 5.12(고급) 정도로 나타낸다. 지금 내 등급은 5.10쯤이다. 프로젝트를 통해 중급에서 고급으로 가는 관문인 5.11급에 이르기 위해 훈련하기로 했다. '5.11이 보인다' 연재는 그 과정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담을 계획이다.
취미로 즐기다보면 자연스럽게 닿는 5.10 난이도와 달리 5.11급은 훈련이 필요하다. 팔과 손가락, 다리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 식단도 조절해야 한다. 몸무게가 무거우면 등반이 어려워진다. 등반이 일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단계다. 쉽게 말해 5.11급의 암벽등반 코스를 등반하려면 거의 매일 실내 암장 등지에서 운동해야 한다. 매일 달리기를 하는 마라토너처럼 말이다.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
어떤 훈련이 나에게 효과적일까? 내 주변엔 온통 볼더러밖에 없다. 그들을 붙잡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지만 모두 "모른다"는 답변만 얻었다. 누군가 내게 지구력 훈련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구력이 뭐지? 등반할 때도 지구력이 필요한가?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볼더링 위주의 훈련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서 별 도움을 얻지 못한 나는 옛날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옛날 월간산에 훈련법이 나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우리 회사(월간산)의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거기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월간산 과월호들이 쌓여 있다. 그 사이사이 재미있어 보이는 등반 서적들도 보물처럼 숨어 있다. 창고에서 나는 <5.13이 보인다>는 책을 발견했다. 곧바로 집어 들고 사무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 책은 2000년에 발행됐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무산소 트레이닝, 근지구력 트레이닝, 피라미드 트레이닝, 클라이밍 식품과 영향…. 복잡한 숫자와 그래프가 가득 차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치 대학 전문서적 같았다. 나는 이 내용을 직접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혼자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훈련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지도에 '클라이밍'을 검색했다. 온통 볼더링장뿐이다. 내 주변만 봐도 모두 볼더링을 한다. 지금 한국은 볼더링 전성시대다. 볼더링 훈련을 열심히 한다면 5.11 등반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만은 않다.
길어야 3m 정도의 짧은 코스의 루트에서 폭발적인 힘을 이용해야 하는 볼더링과 다르게 내가 하려는 '루트 등반'은 등반 길이 보통 10m 이상으로 길고 다양한 동작이 복잡하게 연결된 형태라 지구력이 필수다. 그러니까 벽에 오래 매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유리하다. 볼더링이 단거리 스프린트라면 루트등반은 장거리 마라톤인 셈이다. 서울 곳곳에 널린 볼더링장 말고 지구력 훈련을 할 수 있는 암장을 찾아야 했다.
때묻은 지하감옥, 훈련에 최적합
5.11을 위해 훈련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서울 곳곳을 뒤졌다. 볼더링 암장이 유행하기 전 선배 등반가들이 주로 운동을 하던 로컬 지구력 암장을 물색했다. 찾아간 암장들은 대부분 언덕 위, 골목 깊숙이 있었다. '이런 데에 암장이 있다고?' 하는 곳에 있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도봉산 아래 있는 한 암장이었다. 지구력 암장 중 시설이 쾌적하고 넓은 편이었다. 난이도별로 루트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훈련하기 좋아 보였다. 하지만 회사나 집에서 너무 멀었다.
다음으로 회사 근처의 암장을 찾아갔다. 퇴근 후 운동하기 더할 나위 없었지만 난이도 체계가 없는 자유 형식의 암장이어서 체계적인 훈련에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서울 스포츠 클라이밍센터'라는 곳에 안착했다. 허물어져 가는 민트색 벽, 난방이 없어 냉기가 도는 공기, 벽에 붙은 멋들어진 인수봉 사진. '강해지려는 자, 이 곳으로 와라' 들어오라 손짓하는 허상이 보였다. 나는 그 부름에 흔쾌히 승낙하며 찬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곳은 5.11 프로젝트 훈련을 위해 준비된 '던전(지하감옥)' 같았다. 시설도 거의 없고 공기도 좋지 않은 이 암장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이 지하의 쾌쾌한 냄새가 나를 5.11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안강영 센터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저 5.11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안 센터장은 이렇게 답했다.
"암장 열심히 다녀야지. 근력운동도 따로 해야 돼. 손가락 강화운동도 해야지. 평일에도 퇴근하고 암장으로 와. 홀드 500개씩 잡고. 지구력 훈련 끝나면 마무리 운동도 꼬박꼬박해. 코어운동, 상체 운동 빼먹지 말고."
스파르타 훈련을 시작했다. 좁은 벽에 빼곡하게 붙은 홀드를 잡았다. 센터장은 등반하다 힘이 부족해 벽에서 떨어지는 나를 째려봤다. 나는 잽싸게 다시 벽에 붙었다. 민트색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암장엔 탁, 탁, 탁 막대기로 다음 홀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둔탁하고도 믿음직한 소리였다.
서울 스포츠 클라이밍센터 (02-928-4677)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119-42 | 지구력 훈련에 특화된 전형적인 로컬 지구력 암장이다. 손가락 힘, 상체 근력 강화를 위한 트레이닝 벽이 일부 있다. 구분된 공간엔 벤치프레스 기구와 덤벨들, 다양한 근력 운동 기구가 있어 마무리 운동이 가능하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으나 시설이 좋지는 않다. 냉난방 시설이 부족해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전기난로로 땀을 식히고 손발을 녹여야 한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다.
*다음 연재에서는 볼더링 붐 시대에도 살아남은 보물 같은 지구력 암장들을 살펴보자.
볼더링 암장 vs 지구력 암장
볼더링 암장은 짧은 루트(홀드 10개 전후)가 주를 이루며, 문제는 보통 한 달 단위로 새롭게 바뀐다. 시설이 쾌적하고 접근성이 좋은 경우가 많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지구력 암장은 긴 루트(홀드 30~50개 이상)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붙어 있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훈련용 루트가 많다. 시설은 다소 노후하고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각 암장마다 뚜렷한 정체성이 있고 회원 수가 적어 커뮤니티가 끈끈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볼더링 암장은 대기업의 놀이공원 같은 느낌, 지구력 암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노포 맛집에 가깝다.
프로젝트 루트 고르기
다음날, 나는 5.11 프로젝트에 걸 맞는 등반 루트를 찾아 나섰다. <한국의 암벽> (충청+전라+제주)을 펼쳤다. 전라북도 고창 선운산에는 스포츠 등반 루트가 가득한 명품 바위가 있다. '속살바위'라는 바위다. 누구든 암벽등반에 재미를 붙이면 한 번쯤은 주말마다 찾게 된다는, 스포츠 등반계의 핫플레이스다.

속살바위의 수많은 루트 중 새내기(5.11b)를 목표 루트로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새내기는 등반계에서 공인된 대표적인 입문자 루트다. 이 길을 완등해야 비로소 '스포츠 클라이밍에 입문했다'고 인정해주는 관습이 있을 정도다. 새내기가 '5.11이 보인다' 프로젝트에 딱 맞는 루트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새내기를 졸업하고 헌내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덮고 다시 암장으로 향했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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