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 권리’를 말하다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 2026. 1. 2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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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빙하는 따뜻해진 온도로 확산한 조류와 북반구 산불에서 발생한 블랙카본으로 하얀색을 잃고 있다. 거뭇한 색을 띠는 그린란드 빙하. 다크스노우프로젝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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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아들이 나에게 ‘동네 슈퍼에 가자’고 할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들은 아이스크림 냉동고 구석에 낀 하얀 성에를 한 주먹 떼어다가 아스팔트 위에 뿌린다. “아빠, 온실가스가 얼마나 줄었어?” ‘네 손톱에 낀 박테리아만큼도 안 돼’라고 말해주려다 나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가 이 놀이에 열중한 것은 내가 ‘알베도(Albedo) 현상’을 들려주고 나서부터였다.

극지방의 알베도(반사율)는 기후 시스템이라는 정교한 시계가 째깍거릴 수 있게 돕는 핵심 톱니바퀴다. 알베도에 이상이 생기면 기후는 붕괴하고 만다.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 중 30%는 우주로 되돌아간다. 대기의 하얀 구름 그리고 남북극의 하얀 빙하와 바다 얼음이 반사한 덕분이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지구는 곧장 금성 같은 ‘찜통 행성’이 된다. 불행히도 지구의 알베도 능력은 떨어지고 있다. 단지 빙하와 바다 얼음이 녹아 없어져서만은 아니다. 북극 빙하의 색깔이 자꾸 거무튀튀해지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미국 출신의 기후학자 제이슨 복스가 북극 그린란드 남서부의 한 빙하를 촬영한 동영상이 에스엔에스를 뒤흔들었다. 빙하는 가뭄에 쩍쩍 갈라진 황톳빛 토지 같았다. 여러 과학자가 이른바 ‘검은 빙하’(dark snow)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빙하의 색깔이 어두워질수록 알베도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발맞춰 기후변화는 가속화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절박했다.

그간 연구에서 다수의 범인이 드러났다. 따뜻해진 온도에서 폭발적으로 번식한 보랏빛 조류 그리고 크리스털 형태를 잃고 뭉툭해진 눈 결정이었다. 의외의 범인은 ‘블랙카본’이라 불리는 미세먼지였다.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캐나다의 산불과 북반구의 산업 지대 굴뚝에서 날아온 먼지가 빙하 위에 내려앉아 검은 멍을 들인 것이었다. 하얀 눈 속에 박힌 검은 가루는 열 포획 장치로 작동했다. 그린란드 빙하의 알베도 능력은 과거에 견줘 현저히 떨어져 있다. 2000~2012년 사이 그린란드 빙하 전체의 평균 반사율이 약 4~6% 감소하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특히 ‘검은 빙하’ 현상이 심한 지역에서는 절반 수준으로 급락하기도 했다.

지구가 겪는 격변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장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 영토와 광산 개발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기후변화를 공공연히 부정하는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행보는 검은 빙하가 만든 틈새에 서 있다. 얼음이 많이 녹을수록 광물을 캐내고 운반하기 쉽다. 트럼프가 탐내는 쿠아네르수이트의 희토류 광산은, 12년 전 기후학자 복스가 ‘지구의 거울이 깨지고 있다’며 검은 빙하를 촬영했던 그린란드 남서부 지역에 있다. 멀리서 날아온 산불 먼지만으로도 빙하가 그렇게 검게 멍들었는데, 대규모 노천 채굴을 하며 희토류와 우라늄 먼지를 뿜어댄다면 그 빙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또 알베도는?

이 지역의 희토류는 방사성 우라늄을 함유하고 있어서 국가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하지만 2021년 그린란드 총선에서 친환경 성향의 ‘이누이트 아타카티기트’ 정당이 승리하면서, 그린란드는 일정 비율 이상의 우라늄이 함유된 광물의 채굴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희토류는 암석에서 분리하는 과정에서 독성 화학물질이 쓰여서 환경 오염과 노동자 안전에 대한 문제가 뒤따른다.

그린란드의 위기는 인류사적 관점에서나 자연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전환을 보여준다. 두 전환이 만나는 지점이 북극이다. 기후변화 부정론자 트럼프가 총성을 울리자, 북극 개발의 서막이 열렸다. 이 사태를 자원 경쟁과 제국주의 시대의 부활로 읽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2005년 이누이트환북극이사회(ICC) 의장이었던 실라 와트클루티에는 이누이트 62명과 함께 미국 정부를 상대로 ‘추울 권리’(The right to be cold)를 보장하라는 청원을 제기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에게 바다가 있어야 하듯, 북극 원주민에게는 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추울 권리를 빼앗은 가해자가 그 피해의 산물인 하얀 얼음 없는 땅까지 가져가려 드는 파렴치한 비즈니스 앞에서 우리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누구와 어깨 걸고 싸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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