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1000명 오디션 속 빛나는 한 배우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2026. 1. 2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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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와 프로듀서에게는 공통의 꿈이 있다. 아직 그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나만의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는 것이다. 머리로 떠올린 등장인물이 눈앞에 실제로 걸어 들어오는 상상을 하며 오늘도 열심히 발품을 판다. 열심히 공연을 보고, 열심히 대학 졸업 발표회를 찾아다니고, 관계자들과 밥을 먹으며 열심히 새로운 배우들의 소문을 듣는다.

하지만 새로운 배우를 만나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열심히 발품을 파는 것도 내 경험과 인간관계의 그라운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오디션을 본다. 미지의 세계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배우를 발굴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연서를 띄운다. “우리는 이러이러한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이러이러한 등장인물이 탄생했기에, 이러이러한 배우 분들을 모십니다.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오디션 공고를 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지원하는 배우 숫자가 거의 1000명에 육박한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배우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전율이 흐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000명의 지원파일을 살펴본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만나고 싶다. 하지만 쉽지 않다. 한 명에 5분씩 오디션을 본다 해도 1000명이면 5000분이다.

100시간에 가깝게 오디션을 보는 것은 지원한 배우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다. 그러나 현실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한 명당 5분이라는 시간을 배정한다 해도 칼같이 끊을 수 없다. 오디션장에는 정말로 다양한 배우들이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떨면서 곧바로 시작하지 못하는 배우가 있다. 그럼 그 배우가 진정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지정된 연기를 하다가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하고 싶다고 말하는 배우가 있다. 그럼 당연히 기회를 줘야 한다. 준비해 온 재주가 있어서 꼭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는 배우가 있다.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검술을 펼친다. 그럼 최선을 다해서 지켜봐줘야 한다. 비록 우리가 준비하는 공연에 춤과 악기와 검술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어떤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으면 그대로 보낼 수 없다. 흥분된 마음으로 앞다투어 이런저런 요청을 거듭한다. 그 요청을 보란 듯이 해낼 때마다 탄성이 흐른다. 그 요청과 탄성이 흐르는 시간은 어느새 10분을 훌쩍 넘긴다. 이렇게 몇 분씩 지연되면서 오전 11시에 보기로 한 배우가 오후 1시로, 오후 3시에 보기로 한 배우가 저녁 5시로 미뤄진다. 이렇게 되면 배우에게 엄청난 실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1차로 들어온 오디션 파일 중에서 실제로 오디션을 볼 배우들을 선정한다.

선정 방법은 다양하다. 지원 서류의 신청 동기를 보며 마음을 울리는 배우를 뽑거나, 공연 이력을 살피며 믿을 만한 경험을 지닌 배우를 찾는다. 프로필 사진을 뚫어져라 보면서 눈빛이 맑은 배우를 발견하기도 하고, 연기와 노래 영상을 보며 어느 정도 검증된 배우들을 모으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대략 이 배우가 잘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디션장에 실제로 배우들이 들어오는 순간, 거의 모든 것이 전복된다. 배우라는 존재가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보여주는 열정과 에너지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그 순간부터는 지원 파일도, 예상 캐스팅표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눈과 귀로 밀려드는 감동의 총량을 가늠하기 위해 몸부림칠 뿐이다. 그렇게 온몸을 감동으로 두들겨 맞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배우가 보란 듯이 탄생해 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내 모든 예상과 안목이 한순간에 뒤집어진 경험이 딱 한 번 있다. 몇 년 전, 어느 지역 재단에서 제작한 재즈 뮤지컬에 작가로 참여했다. 지원한 배우들을 보며 반가운 이름이 많았다. 그들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 그들 중에 주인공이 탄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디션 마지막 날의 마지막 시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우가 들어와서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 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 전율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오디션장에 있던 연출과 작곡가도 똑같이 숨을 쉬지 못했다. 서로 말을 안 해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 배우를 주인공으로 발탁했다. 그 배우의 이름은 홍나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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