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통해 삶을 묻다] 고인돌 곁에 앉아 찻물을 데우며

하영란 기자 2026. 1. 28. 23:3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선호 시인의 시 '고인돌'
생은 끓고 식는 물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떫은맛 우려내는 일이죠
정선호 시인

우리는 선조들이 살다간 시대 위에서 살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수 없는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 위에서 밭을 일구고 작물을 심는다. 밭이랑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돌과 함께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굴곡진 삶을 위로하는 찻물을 데우고 차를 마시면서 말이다.

차밭 사이에 놓인 고인돌은 자라는 찻잎들 사이에서 묵묵히 그저 앉아 있다. 그저 앉아있는 것 같지만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에 숨결이 더해서 그 기운을 품고 있다. 굴곡진 삶과 파문까지도 묵직하게 품고 있다. 품고 있는 기운이 바람에 실려서 멀리 불어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불어온다. 바람은 비의(秘義)를 전하고 싶지만 그 비의는 전해지지 않는다. 쉽게 전해지는 것은 비의가 아니다.

정선호 시인의 시 '고인돌'에서 시적화자는 '오늘 나도 고인돌 곁에 앉아', '찻물을 데'운다.

찻물을 고인돌 위에서 데우는 것이 아니라, 고인돌 곁에 앉아서 데운다. 왜 그렇게 할까 궁금하다. 고인돌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일까. 선조들의 숨결을 단단하게 껴안은 고인돌을 마음으로 들이기 위한 의식일까. 찻물을 데우고 차를 바치며 선조들에게 예를 표하는 것일까.

찻물을 데워 차를 마신다는 것은 '찻잎'이 머금고 있는 기운과 향, 지나온 시간을 마시는 것이다. 고요하게 마음을 정제한 후에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선(禪)에 드는 것이다. 고요를 마시는 것이다. 그 고요를 마시면서 '묵은 정적을', '혀끝으로 다시 읽는'다. '숨결 위에 숨결을 얹는'다. 그 후에 오는 것들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생'에 대해서 직관을 통해 느껴봐도 좋다.

차를 마시면, 지나온 시간이 몸으로 스민다. 혀끝에 전해지는 향이 깊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적화자는 고인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란 찻잎들이 담고 있는 것을 느껴본다.

차를 마시며 숙고에 숙고를 한 끝에 '생이란 끓고 식는 물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떫은맛을 우려내는 일'이라는 결론을 비로소 도출해 낸다.

고인돌

새벽이슬 머금은 푸른 잎들 사이
수천 년 동안 묵언 수행하는 고인돌

고인돌 아래에서 뿌리내린 이들은
차밭을 일구고 찻물을 데우며
어떤 파문을 읽고
어떤 굴곡을 다듬었을까

바람에 그 숨결 아직도 머물고
이랑마다 번지는 묵직한 기운은
그들이 남기고 간 비의秘義 

오늘 나도 고인돌 곁에 앉아
찻물을 데우네

차를 마신다는 건 묵은 정적을
혀끝으로 다시 읽는 일
숨결 위에 숨결을 얹는 일

생이란 끓고 식는 물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떫은맛을 우려내는 일
-정선호 시집 「만날고개에서 만나요」(2025, 실천문학)에서
 

Copyright © 경남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