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앞에서 견딘 43년처럼 … "팔선 음식은 기다림의 미학"

박윤균 기자(gyun@mk.co.kr) 2026. 1. 2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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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식의 정점' 신라호텔 팔선…장금승 총괄셰프 인터뷰

대한민국 중식의 위상을 논할 때 서울신라호텔 '팔선'은 언제나 그 정점에 서 있다. 1979년 개관 이래 팔선은 단순한 식당을 넘어 한국 중식의 '사관학교'이자 국빈을 맞이하는 '미식의 영빈관'으로 불려왔다. 이 거대한 명성의 최전선에는 1984년 입사해 올해로 43년째 주방을 지키고 있는 장금승 총괄셰프가 있다. 강산이 네 번 변하는 시간 동안 불 앞을 지켜온 그는 3대째 이어지는 100년 중식 가문의 적자이기도 하다. 최근 매일경제는 장 셰프를 팔선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장 셰프 집안은 한국 중식의 역사 그 자체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5년 한국으로 건너와 당대 최고 중식당이자 중식 요리사의 요람이었던 '아서원'에서 근무했다. 아버지는 그 뒤를 이어 아서원과 4대 문파 중 한 곳인 '홍보석'의 총괄셰프를 지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업으로 내려온 중식의 혼은 장 셰프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어린 시절 그가 곁에서 지켜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르침은 화려한 기술보다 '겸손'에 맞닿아 있었다. 장 셰프는 "할아버지께서는 주변에는 항상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본인이 최고라는 자만을 경계하라고 늘 말씀하셨다"며 "다른 사람이 잘한다고 인정해야 비로소 진짜 실력이라는 그 가르침이 40년 넘게 내가 흐트러지지 않고 주방에 설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고 회상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어릴 적 고추나 파를 싫어하는 편식쟁이였다는 점이다. 그는 "손자가 고추를 안 먹으니 할아버지가 고추 속에 고기를 채워 바삭하게 지져주셨는데, 그게 정말 맛있었다"며 "그 덕분에 지금은 못 먹는 게 없는 미식가가 됐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찾는 셰프가 됐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팔선의 역사를 논할 때 전임자이자 중식의 대부인 후덕죽 셰프를 빼놓을 수 없다. 장 셰프가 후 셰프의 뒤를 이어 팔선을 맡게 됐을 때, 그는 팔선이 수십 년간 쌓아온 정통 광둥요리의 기틀과 '3저 1고(저지방·저칼로리·저콜레스테롤·고단백)'라는 건강 철학을 변함없이 계승했다. 하지만 그 위에 입힌 색깔은 장금승다웠다.

홍소육 등으로 구성된 신메뉴 에디션 8.

그는 고전적인 팔선의 방식은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고객의 미감을 공략하기 위해 '모던 중식'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장 셰프는 "정통의 골격은 지키되 다양한 취향을 가진 고객의 눈과 입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며 중식 재료로 생소한 세계 3대 진미인 트러플, 캐비아, 푸아그라를 과감히 메뉴에 적용했다. 또 20·30대의 입맛을 연구해 젊은 층이 선호하는 마라향과 서양식 요리 방법을 도입한 '에디션 8' 코스를 탄생시켰다. 전임자가 팔선을 '넘볼 수 없는 성지'로 만들었다면, 장 셰프는 그 성지의 문턱을 낮추고 젊은 세대까지 열광하게 만드는 '미식의 확장'을 이뤄낸 셈이다.

장 셰프가 정의하는 '팔선다움'은 식재료의 차별화, 조리사의 스킬, 그리고 탄탄한 조직력이라는 삼박자의 결합이다. 그는 "중국 본토 최고의 맛을 전하기 위한 기준은 결국 '최상의 식재료'에서 온다"고 단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주방 내에 '라이브 해산물 전용 수족관'을 신규 도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킹크랩, 다금바리, 능성어 등 최상급 라이브 해산물을 주문 즉시 손질해 내놓는 시스템은 정통 조리법에 신선도를 결합한 장 셰프만의 새로운 표준이다.

팔선의 요리는 기다림의 미학이기도 하다. 장 셰프는 "불도장에 들어가는 건해삼 하나를 제대로 불리는 데만 꼬박 4일이 걸리고, 호주 태즈메이니아산 건전복을 요리화하는 데는 무려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설명했다.

불도장·북경오리 등 팔선의 대표 메뉴가 집약된 골든 하모니. 신라호텔

그는 "이런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팔선의 맛이 나오지 않는다"며 매일 오전 8시 식재료 검수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소스를 직접 맛보며 당일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루틴은 43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그만의 의식이다.

팔선을 상징하는 '불도장' '북경오리' '지존갈비'에는 장 셰프의 연구와 집념이 녹아 있다. 특히 그가 강력 추천하는 지존갈비는 중국 쑤저우의 한 레스토랑에서 맛본 뒤 잊을 수 없어 직접 주방장을 찾아가 조리법을 전수받은 메뉴다. 그는 "극도로 부드러운 육질과 깊은 소스를 구현하기 위해 국내산 한우를 사용해 맛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다"고 밝혔다.

또 중국 고서 속 레시피를 연구해 요리에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과거 중국 VIP 중 간장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간장 요리를 못 드시는 분을 위해 간장 없이도 그 풍미를 낸 '홍소육'을 연구했다"며 "1월 말 새롭게 선보일 메뉴에서는 정통 광둥식에 서양식 프레젠테이션을 도입해 중식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전했다.

주방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총괄셰프지만, 집에서는 가족을 위해 기꺼이 웍을 잡는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장 셰프는 "감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게살 수프를 자주 끓여주곤 했다"며 "이제 다 큰딸이 아빠가 끓여준 수프를 먹으면 감기가 다 낫던 기억이 난다고 말해줄 때 셰프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그에게 맛있는 음식이란 단순히 혀를 자극하는 맛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는 음식"이다. 그는 "해외 거주 중에도 귀국할 때마다 팔선을 찾아주는 고객을 볼 때마다 요리로 누군가에게 대접받았다는 느낌과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슬럼프가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곁을 지켜준 동료들을 먼저 언급했다. 그는 "일과 동료에 대한 책임감이 주방을 지키는 원동력"이라며 "사실 팔선의 명성은 장금승이라는 개인 한 명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장 셰프는 "팔선의 진짜 강점은 개별 셰프의 뛰어남을 넘어선 집단의 강함, 즉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탄탄한 팀워크와 조직력에 있다"며 주방 동료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특히 그는 최근 사내 경진대회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성장하고 있는 후배들을 언급할 때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개발한 요리에 대해 귀를 열고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는 후배들이 더없이 자랑스럽다"는 그는 "내가 은퇴하더라도 이들이 팔선의 명성을 더 찬란하게 이어갈 것이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3대째 이어져온 100년의 시간, 그리고 장 셰프가 바친 43년의 세월. 그가 지켜온 것은 화려한 요리 기술이 아니라 고객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직함과 겸손, 그리고 '함께'의 가치를 아는 팔선의 정신이었다. 장 셰프는 "팔선의 성장이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도록 든든한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임무"라며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저녁 영업을 위해 현장으로 움직였다.

[박윤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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