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인 듯…현대의 눈으로 전통을 보다

김봉아 2026. 1. 2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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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건축] (9) 충북 청주 ‘국립청주박물관’
기와나 목재 없이도 한옥 느낌 물씬
현대건축 거장 ‘김수근’ 창의적 작품
경사 따라 건물 배치…자연과 조화
전통 ‘군집미’에 현대 ‘조형미’ 더해
충북 국가유산 등 1400점 상설 전시
현대건축 거장 김수근이 설계한 국립청주박물관. 낮은 건물들이 산자락에 안겨 고즈넉한 산사를 연상시키며, 기와를 포갠 듯한 지붕선이 인상적이다. 청주=현진 프리랜서 기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날, 충북 청주로 떠난 것은 한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짙푸른 기와에 하얀 눈이 쌓인 것 같은 지붕들이 어깨를 겯고 산속에 옴팍하게 안겨 있는 사진. 마치 고즈넉한 산사 같은 모습에 눈길이 멈췄는데, 그곳은 절이 아닌 ‘국립청주박물관’이었다.

국립이나 시립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회색으로 된 콘크리트 몸체에 기와지붕을 얹어 한옥의 외관만 본뜬 건물이다. 그런데 기와나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도 한옥 같은 느낌이 드는 건물이라니 과연 어떤 모습일까.

청주박물관은 국내 1세대 현대건축 거장인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했다. 1931년생인 김수근은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귀국해 1986년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건축물을 설계했으며, 종합예술지인 ‘공간(空間)’을 창간하는 등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현대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서울 공간사옥(현 아라리오뮤지엄)과 경동교회·자유센터·올림픽주경기장·세운상가 등이 있다.

1987년 개관한 청주박물관은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우암산 동쪽에 있다. 6만6799㎡(2만242평)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박물관 입구에 서면 계단과 석축이 먼저 보인다. 자연석으로 쌓아 눈길을 끄는 석축과 석상·수목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르자 건물이 하나둘 나타난다.

나지막한 건물들은 한옥처럼 수수하면서도 현대건축의 조형미와 입체감을 드러낸다. 노출콘크리트로 된 외벽에 길게 이어진 가로선과 지붕의 강렬한 세로선 덕분이다. 처마를 빠져나와 자연 속으로 들어가려는 가로선들을 지붕의 세로선들이 잡아주는데, 완만한 시옷(ㅅ) 자 모양의 맞배지붕이 포근하게 감싸준다. 언뜻 보면 기와 같지만 콘크리트와 동판으로 한옥 지붕의 선을 표현한 것이다. 기왓등처럼 솟은 부분에 하얀 색감이 더해지면서 독특한 선이 완성됐다.

김수근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건물을 보면서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주로 쓰인 벽돌이나 노출콘크리트가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의 건축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초기인 1960년대에는 노출콘크리트를 활용한 모더니즘 양식을 추구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벽돌을 사용해 중첩된 공간을 구성하는 독창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1965년 설계한 국립부여박물관은 김수근 건축의 변곡점이 됐다. 박물관을 두고 일본의 신사를 닮았다는 ‘왜색(倭色) 논란’이 벌어지면서 한국적인 미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미술사학자인 고(故)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 전국의 사찰과 민가를 답사하며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후 청주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월지관)·국립진주박물관을 통해 자신만의 건축 언어로 ‘전통성’을 표현했다.

그는 “기와만 얹었다고 해서 전통을 잇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라며 “전통을 현대의 눈으로 다시 보고, 나아가서 창조활동을 통해 현대의 눈 이상 내일의 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주박물관은 그중에서도 전통건축의 ‘군집미’를 잘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큰 건물 대신 저층 건물 여러 채를 경사에 따라 배치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박물관 위쪽의 상설전시관에서 내려다보면 지붕들이 중첩된 듯한 모습이 보인다. 상설전시관은 여러 건물이 통로로 이어진 형태로 건물 사이에는 중정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내외부 공간이 교차되는 전통건축을 닮은 구조다.

상설전시관 건물 사이에 있는 중정. 가로선이 길게 이어진 외벽과 지붕, 석축과 나무, 석상까지 박물관의 특징을 한데 모아놓은 듯하다. 청주=현진 프리랜서 기자
상설전시관 통로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중정이 보인다. 전시실을 이동하며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청주=현진 프리랜서 기자

통로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 전시실을 이동하며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네모난 창으로 중정을 바라보니, 박물관의 특징을 뽑아 모아놓은 작품 같다. 건물의 외벽과 지붕, 석축과 나무, 석상까지 모두 액자 속에 들어 있는데 한옥의 안뜰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난다. 자연과 문화·건축이 이토록 세련되게 어우러질 수 있다니.

여러 건물이 연결된 구조인 상설전시관. 충북에서 발굴된 유물과 금속 국가유산 등 14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청주=현진 프리랜서 기자

건축을 살피던 눈길을 전시실의 유물로 옮겨본다. 청주박물관은 충북지역에서 융성했던 금속문화를 테마로 전시를 진행 중이다. 상설전시관의 고고실·미술실·금관실에는 충북에서 발굴된 금속 국가유산 등 14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상설전시관 옆에는 어린이박물관·특별전시실이 있는 ‘청명관’, 디지털대장간과 4D시네마실로 구성된 ‘청련관(디지털전시관)’이 자리한다. 야외에는 문인석·부도 등 고(故)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석조 국가유산 210여점이 놓여 있다.

하얀 지붕을 굽어보며 내려가는 길. 고즈넉한 겨울 산사에 잠시 들었다가 속세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50여년 전 오랜 고민 끝에 찾은 건축가의 답은 지금도 유효할까. 우리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속세의 사정을 떠올리니, ‘전통의 창조적 계승’은 어느 시대든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인 듯싶다. 정답은 하나가 아닐 테니 ‘어떻게’라는 질문을 품고 또 떠나는 수밖에. 서너대의 차를 거덜내며 전국을 돌아다녔다는 건축가처럼. 

청주=김봉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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