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순간에 자그마한 도움… 아직도 가슴엔 따스함 한아름[고맙습니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다.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여의도 불꽃축제에 아빠와 단둘이 나섰다가 벌어진 일이다. 폭죽이 터지자 흥분한 녀석은 아빠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아갔고, 덩치가 큰 남편은 밀밀한 사람들 틈에 끼어 아이를 놓쳐 버렸다.
그 당시 아들은 휴대전화도 없었다. 불꽃이 잦아들고 그제야 아빠를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녀석이 주변의 어른들에게 휴대전화를 빌려 달라고 했지만, 야속한 사람들은 빌려주지 않았다. 많은 거절을 거쳐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께서 드디어 휴대전화를 빌려주셨다. 하지만 계속 통화 중 신호가 뜨고 아빠와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당황한 아들에게 아주머니는 ‘괜찮으니 천천히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통화가 되었고, 둘은 만날 수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녀석에게 어른은 의지할 수 없고, 두려운 존재로 남았을지 모른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어렴풋하지만 내 기억 속에도 그 아주머니 같은 분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엄마는 보온병에 따뜻한 보리차를 넣어 두곤 했다. 그날은 물을 마시려고 병을 들었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장창’ 마룻바닥에 떨어진 보온병의 내부 유리가 깨졌다. 병이 깨지면서 흘러나온 물로 바닥이 흥건했다. 서둘러 걸레로 물을 훔치다가 돼지 저금통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 보니 제법 묵직했다. 엄마에게 혼날 것이 무서웠던 나는 저금통을 뜯기로 했다. 돼지 배가 보이게 뒤집어 놓은 후 커터칼로 배를 가르는데, 손이 덜덜 떨리며 잘되지 않았다. 비지땀을 흘리며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간신히 칼집을 내고 좁은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작은 구멍을 여러 차례 드나든 탓에 손가락은 빨갛게 부풀었다. 하지만 고생에 비해 많은 돈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어린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엄마의 꾸중을 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삶의 법칙을 온몸으로 익혔다. 있는 돈을 모두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고, 보온병을 들고 시장으로 달려갔다. 시장이 가까워지자 저녁 무렵 불을 밝힌 노점상 천막의 노란 알전구 불빛이 반짝거렸다.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얼마나 달렸던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 시장 안쪽에 있는 주전자와 그릇, 냄비 등을 파는 가게를 찾아 들어가며 소리쳤다. “아저씨! 이거랑 똑같은 거 있어요? 진짜 똑같은 거요!” 다행히도 내가 깨뜨린 것과 똑같은 것이 있었다. 완전 범죄에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가진 돈이 모자랐다. 찬바람을 가르며 달리느라 빨갛게 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인아저씨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훌쩍이며 사정을 얘기했다. 마음씨 좋은 그분은 있는 돈만 내고 가져가도 된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 말씀에 언제 울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두 손 가득한 동전을 드리고, 얼른 새 보온병을 받아 들었다.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외치며 집으로 달렸다. 하지만 집에는 이미 엄마가 돌아와 계셨다. 배 터진 저금통과 커터칼, 물을 닦은 걸레가 마루에 뒹굴고 있었고, 내 손에는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흔적들은 하나도 치우지 않고 병만 바꿀 생각을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아이다운 허술한 행동에 웃음이 난다. 엄마는 꾸중 대신 따뜻한 손으로 내 볼을 감싸 녹여 주셨다. 이후로도 엄마는 그날 일에 대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용서는 말보다 행동으로 더 깊이 전해진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아빠를 잃어버린 아들을 도와주신 아주머니, 곤경에 처한 어린 나를 배려해준 그릇 가게 아저씨, 자식의 잘못을 너그러이 감싸주는 부모님…. 그런 분들은 세상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살다 보면 때때로 예고 없이 폭풍우가 몰아치지만 스쳐 간 따스한 체온 하나가 그 계절을 견디게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거창한 도움이 아니라 그 순간 기꺼이 손을 내민 마음이다. 삶의 길목, 곳곳에 숨어 있는 키다리 아저씨들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연대감을 느끼고, 긍정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윤동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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