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에 ‘제값’을 붙여주는 여자…가락시장의 경매사 허은정[여자, 언니, 선배들⑧]

김서영 기자 2026. 1. 2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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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정 경매사가 20일 서울 송파구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 준비를 하며 환히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소녀는 언니를 보고 자랍니다. 여기 선배가 된 언니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정표이자 버팀목이 되는 [여자, 언니, 선배들]의 일·커리어 이야기를 플랫이 전달합니다.
“경매사의 역할이 출하자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보니,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런 일을 잘 해결했을 때 제일 뿌듯합니다.”

농산물은 산지에서 우리의 식탁으로 오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친다. 생산자와 최종 소비자 간 직거래 경로가 많이 생겼다고 해도, 가공을 거치기 전 단계의 원물은 여전히 도매시장에서 대면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기자가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을 찾은 지난 20일도 허리보다 더 높이 쌓인 농산물 상자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게차와 자전거를 탄 직원들이 상자 사이사이 난 길로 바삐 오갔다. 그나마 출하량이 적은 겨울이라 이 정도라고 했다.

동화청과 경매사 허은정 과장(38)도 이날 저녁 경매를 위해 한창 준비 중이었다. 그는 본격적인 경매 절차에 앞서 모니터 두 대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출하자들과 전화로 “물건이 똑같다고 시세가 비슷하진 않죠” 등의 이야기를 분주히 주고받았다. 곧바로 경매가 이어졌다. 응찰기를 손에 쥔 중개인들 앞에서 그 능숙하게 쌈배추 경매를 진행했다.

허은정 과장은 2013년 동화청과에 입사해 약 10년 동안 정산 업무를 맡다가 경매사로 방향을 바꿨다. 경매사 자격증은 2014년에 진작 따놨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은 현장 일(경매사)이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물론 아직도 전국에 여성 경매사는 손에 꼽힌다. 이날 시장을 오가는 이들 대부분도 남성이었다.

허은정 과장은 경매사의 일을 설명하면서 ‘제값’과 ‘소통’을 강조했다. 피땀 흘려 재배하고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에 팔 수 있도록 농산물의 품질을 평가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것이 경매사의 일이다. 그렇지만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생각하는 ‘제값’이 일치하는 일은 별로 없다. 가격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양쪽에게서 신뢰를 얻는 일이 필수적이다. 허 과장은 그 과정을 두고 “설득이 경매사의 몫”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경매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건 경매사가 하는 일의 아주 작은 일부일지 모른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지난 20일 동화청과에서 허은정 과장을 만나 농산물 경매사의 세계를 소개받았다.

뛰어들다: 익숙하지만 멀었던 경매사의 길
동화청과 경매사 허은정 과장의 사진이 동화청과 사무실에 붙여있다. 김연서 인턴기자

- 어떤 계기로 경매사가 됐나요?

“입사하고 10년 정도 경매사의 업무와 정부 지침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일하다가 현장에 내려갔어요. 현장이 궁금하기도 했고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작은아버지도 (동화청과에서) 당근 경매사를 쭉 하시다 정년퇴직하셨거든요. 올해로 4년 차입니다.”

- 경매사가 되려면 어떤 절차를 거치나요?

“경매사 자격을 취득하려면 필기시험과 모의실기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경매를 모의로 하는 것이죠. 저는 2014년에도 경매사를 하고 싶단 생각이 있어서 자격증을 땄는데, 그때는 ‘여자가 하긴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연이 됐다가, (회사 분위기가 바뀌고) 한번 도전해 보라고 발령을 내주셨습니다. 제 생각에 가락시장에서 경매사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년 정도인 것 같아요. 저도 처음부터 경매사를 했으면 오히려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업무를 겪어보고 이론적으로 아는 상태에서 내려가서 하다 보니 고객 응대나 전문성 측면에서 훨씬 수월하기도 합니다.”

- 경매사는 회사에 소속돼서 일하는 것인가요?

“도매시장법인에 소속이 돼 있습니다. 경매사한테 ‘내 물건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농업법상 경매사는 공무원으로 봅니다.”

*편집자 주: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제28조(경매사의 업무 등) 2항 “경매사는 형법 제129조(수뢰죄)부터 제132조(알선수뢰죄)까지의 규정을 적용할 때에는 공무원으로 본다.”

- 경매사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보통 오후 4시에 출근해서 요즘처럼 출하량이 적은 비수기에는 오후 10시 반쯤 퇴근하고, 물량이 많은 성수기엔 새벽에 퇴근하기도 합니다. 하루는 그날그날 시세에 따라 출하자와 전화도 하고, 다음날 시세를 미리 파악하기도 하면서 바쁘게 돌아가고요.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근무합니다. 처음엔 저녁에 근무하다 보니 바이오리듬이 깨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낮에 아이를 돌보고 저녁에 일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 주 6일 일하는 구조를 보니, 현장에 경매사가 부족한 편인지 궁금합니다.

“부족합니다. 힘들기도 하고 감정노동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잖아요. 시장이 주6일제로 활성화돼 있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시장에서도 주5일을 하려고 해서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쉬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빠져들다: 알면 알수록 어려운 농산물 경매
동화청과 경매사 허은정 과장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경매 준비를 하고 있다. 김연서 인턴기자

- 경매사 일의 어려운 점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품목별 저장성이나 생육 과정을 그냥 시장에서 나오는 물건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산지에 가서 어떻게 작물이 자라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러면서 출하자들과 대화도 해야 합니다. 그런 경험 없이 경매를 시작하다 보니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왕 경매사가 되기로 했으니 목소리만 내서 되는 게 아니라 기초를 다져야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산지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어떤 물건에 하자가 있는지를 중매인에게 얘기해줘야 그들이 그 물건을 한 번 더 검수할 수 있잖아요. 그래야 물건에 대한 제값이 나올 수 있으니 경매사가 사실 굉장히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값’이란 어떻게 형성되나요?

“품위(농수산물품질관리법에 따라 껍질의 얇음, 충실도, 단단함, 색택, 알 모양, 긁힌 정도, 심백 및 복백 등을 평가하여 품질 등급- 특, 상, 보통-을 결정하는 기준)가 딱 정해져 있진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봤을 때 품위에 따라 예상하는 시세는 있거든요. 경매가 굉장히 어려운 게, 물건이 꽤 좋더라도 중매인이 목이 차면(자신이 살 양이 다 차면) 뒤에 아무리 앞에보다 좋은 물건이 있어도 시세는 덜 나오기도 하거든요. 반대로 물량이 달리면 물건이 안 좋아도 시세가 올라가는 경우가 있어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경매이다 보니까 그것을 출하자에게 설득하는 것이 경매사의 몫입니다.”

- 출하자는 시장에 직접 오지 않으니 이해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품위가 좋든 나쁘든 고시세인 경우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저시세일 때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출하자는 농사를 지어 자기 자식 같은 농작물을 보내는 것인데, 시세가 낮을 때에도 이해해야 하다 보니 그 부분이 가장 어려움이 큽니다. 그럴 때 회사(청과 회사)가 지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 품목별로 더 신경 써야 할 지점은 무엇인가요?

“엽채는 다른 작물보다 저장성이 낮은 편이다 보니 물건이 맨눈으로 품위가 좋아 보여도 저장 상태에 따라 시세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저장·냉동 시설이 덕분에 덜 무르긴 하지만 다른 작물보다는 시드는 편이니까요. 출하자로서도 보낼 땐 괜찮았는데 경매 때 무르면 속상한 일이죠. 그래서 엽채류의 경매 시간이 가장 빨라요. 아침부터 출하 작업을 하면 시장에 도착한 지금 시간(초저녁)에 가장 신선해요. 또 작물에 따라 중매인이 보는 것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로즈는 식용이 아니라 호텔 등의 장식용으로 많이 쓰다 보니 크기와 색을 보더라고요.”

- 그동안 어떤 품목을 맡았나요?

“처음에는 상추 품목 경매를 잠깐 봤고, 지금은 쌈채 품목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한 품목을 오래 하게 되면 그 품목에 전문성은 분명히 생기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전문성은 기본으로 하면서, 경매사로서 한 품목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아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작물을 키우기 쉬운 품목도 있고 수요가 많은 품목을 관리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지만 경력이 많다고 해서 특정 품목을 맡게 되는 건 아닙니다.”

- 일반 소비자들은 농산물 가격이 비싸지는 이유로 유통 구조를 꼽기도 합니다.

“종종 ‘중매인이랑 협업해서 가격 담합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중매인은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가격 경쟁을 하기 때문에 담합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데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직거래보다는 한번 거쳐서 가기 때문에 유통비용이 있지요. 도매시장 나름의 가격 안정 기능도 있고, 대금 결제가 지연되지 않고 바로 되는 등의 장단점이 있다고 봅니다.”

마주치다: ‘어디서 여자가’ 이상의 뿌듯함
동화청과 경매사 허은정 과장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쌈채류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김서영 기자

- 경매사가 된 후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처음엔 최저 시세를 받았던 출하자를 나중에 일등 시세를 받게끔 피드백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이 처음 타 지역에서 농사하다 보니 작업 방법이나 (작물) 크기를 몰랐거든요. 시세가 안 나온 이유를 말씀드리면서 ‘물건이 크다’, ‘색이 많이 나지 않는다’ 등의 피드백을 드리니 그분이 납득하고 조금씩 고쳐나가서 비로소 1등 시세를 받으셨어요. 경매사의 역할이 출하자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보니,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런 일을 잘 해결했을 때 제일 뿌듯합니다.”

-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요?

“시세가 낮거나 재경매돼서 출하자와 통화하다 보면 욕설을 듣기도 합니다. ‘어디서 여자가’ 그런 말들도 사실 좀 듣긴 했습니다. 그것을 잘 풀어가고 설득하는 게 제 몫이긴 한데, 그분들에게 제가 인정이 안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가르치는 느낌을 받으시는지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런 것들이 힘들긴 합니다.”

- 그런 일엔 어떻게 대응하나요?

“예상하고 각오했던 부분도 있고, 저도 기본적으로 경력이 있다 보니 지금은 능숙하게 대응합니다. 그런 일은 현장에서만 겪은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도 있었거든요. 일단 그들은 시세가 낮거나 회사에 불만이 있어서 항의하는 것이라서요. 욕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면서 차분하게 안내하는 등 노하우가 쌓인 편입니다. 재미있는 건, 사무실에서는 정해진 답을 가지고 말씀드렸거든요. 현장에서는 제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감정이 좌우될 수도 있어서 (경매사 일에) 메리트를 느끼기도 합니다. 또 ‘시세가 낮게 나와 속상하지만 너무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기분이 나아진다’고 해주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시거든요. 그럴 때 저 나름대로 이 직업이 뿌듯하게 느껴집니다.”

꿈꾸다: 농산물 유통 생태계 속 경매사의 역할
동화청과 경매사 허은정 과장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경매 준비를 하고 있다. 김연서 인턴기자

- 농업 트렌드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나요?

“(전통적인) 농업으로만 작물이 수확되지 않는다는 변화가 조금씩 있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에 스마트팜이 많이 생겼잖아요. 스마트팜 작물, 특히 엽채가 경매에 나오고 있습니다. 스마트팜 작물이 시세가 잘 나오는 편입니다. 원체 작업이 깔끔하다 보니 관심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또 예전에는 무조건 경매를 해야만 물건을 팔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죠. 온라인 경매나 직거래 경로가 생기다 보니 경매가 줄었지만 경매가 없어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 앞으로는 어떤 쪽으로 관심을 두고 있나요?

“아직 시장에 많이 출하되지 않은 특수야채에 관심이 있습니다. 프릴라이스, 미니 통로메인, 버터헤드, 와일드 루꼴라 같은 품목인데요. 옛날엔 샐러드 채소가 생소했지만 소비자의 선호나 생활 방식, 소비 습관이 변하면서 이런 것들을 먹고 있고 생각보다 다양한 종자가 있더라고요. 그런 특수 품목 출하자가 저를 찾아오기도 하고, 제가 찾아내기도 해요. 가격과 품위에 있어서 공정하고 신뢰도 있게 거래하려면 수요 품목이 바뀌는 것에 경매사도 대비하고 공부하고 따라가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빛나다: 10명 남짓한 여성 경매사…능글능글함과 무던함이 무기
허은정 경매사가 20일 서울 송파구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 준비를 하며 환히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여성 경매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이 경매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활동하지 않는다는 설명도 있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국적으로 따져도 10명 정도인 것 같습니다. 여자가 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감정노동이나 욕설 같은 부분이, 저는 많이 겪어보며 생각한 게 있으니 타격을 덜 받는데 그것을 처음부터 경험한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먼저 현장에 갔던 여성 분도 지금은 그만두셨어요. (같이)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 직업으로서 경매사는 어떤 사람에게 잘 맞을까요?

“낙천적이고 활발하고 소통하는 데에 긍정적인 분들이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넘길 수 있고 소위 말해서 능글능글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성격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시세 안 나왔어도 다음에 잘 내드릴게요’ 식으로 무던하게 잘 넘어갈 수 있는 분들은 굉장히 잘하실 거예요.”

- 경매사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어렵고 때로 힘들기는 하지만 메리트가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하기에 힘들다고 해도 여자만의 강점도 있거든요. 자신만의 강점을 살려서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서, 앞으로 여성 경매사가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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