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만 겨울바다가 아냐, 바위 따라 등대 따라 겨울감성 찰싹 [요즘 여행]

이한호 2026. 1. 2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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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강원 속초시 등대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이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겨울바다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강원 강릉시 아들바위공원 갯바위에 파도가 부딪혀 부서지고 있다.

갯바위를 덮친 파도가 자글자글 부서져 하얀 그물처럼 바위를 감싼다. 바위 홈이 물길이 되고 물길이 홈을 깎는다. 뾰족한 것도 같고 둥근 것도 같은 동해 갯바위의 불규칙한 모양이 빚어지는 규칙을 목격하는 중이다. 갯바위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으로 눈을 돌리면 ‘이 바위도 언젠가는 모래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파도친다.

겨울바다 하면 정동진이라지만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봤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파를 뚫고 동해안 북부(강릉~고성) 겨울바다에 당도했다. 왁자지껄한 인파의 소음이 사라진 파도 소리, 매서운 만큼 상쾌한 바닷바람, 몸을 담글 수 없어 더 찬란한 물결. 어느새 나도 부서져 겨울바다의 일부가 된 듯 시린 일체감. 겨울 동해안이 선사하는 선물이다.


갯바위 위에 새겨진 금강산

강원 강릉시 주문진 등대가 주문진항을 내려다 보고 있다.
주문진 등대 주위 언덕에 들어선 등대마을의 전경.

강원 강릉시 주문진 등대는 겨울바다 기행을 시작하기 좋은 지점이다. 나지막한 언덕에서 주문진항을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하얀 등대다. 1918년 3월 20일 일제강점기 시절 세워진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다. 높이 10m의 원통형 벽돌 등탑 외벽에 흰색 석회 몰타르를 발라 근대 초기 등대 건축 양식이 살아 있다. 등대 입구에는 일제의 상징인 벚꽃 문양이, 등탑 곳곳에 6·25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지난 세월을 품고 있다. 전쟁으로 등탑 일부가 파손됐으나 1951년 복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등대 불빛은 15초마다 한 번씩 점등되며 맑은 날에는 37㎞ 떨어진 해상까지 닿는다.

흰 등대 주위로 알록달록한 원색 지붕이 대비를 이룬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 수백 가구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등대마을’이다. 마을이 항구 뒤쪽 언덕 꼭대기에 자리해 ‘꼬댕이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꼬댕이’는 꼭대기를 뜻하는 강원 지역 방언. 피란 시절 작은 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골목길이 미로처럼 좁고 복잡하다. 골목 전신주에 설치된 작은 휴식용 의자는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는 행인을 위한 배려다.

등대마을 북부를 주문진 등대가 지킨다면 남부는 동해안 최대 규모의 성황당(城隍堂)이 지킨다. 조선시대 진이(眞伊)라는 여인이 현감의 수청을 거절하고 목숨을 버리자 일대에 흉어와 질병이 들었는데, 광해군 6년(1613) 부임한 정경세 강릉부사가 사연을 듣고 진이의 넋을 기리려 사당을 지었다. 이후 어촌 주민들이 해마다 이곳에서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본래 사당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1910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주민들은 매년 음력 3월 9일과 9월 9일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비는 서낭제를 지낸다. 3월 9일에는 3년마다 풍어제도 열어 만선과 안전조업을 기원한다.

강원 강릉시 오리나루의 갯바위가 파도와 바람에 깎여 있다.
아들바위공원을 방문한 어린이가 거대한 기암괴석을 올려다 보고 있다.

주문진 등대에서 해안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면 금세 ‘오리나루’에 도착한다. 산자락에서 바다를 향해 뻗은 다섯 갈래 계곡마다 나룻배가 닿던 나루터가 있었다며 붙은 지명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갯바위 지대가 빼어난 경치를 선사하는 곳이다. 해안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 기묘한 형태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선비의 수묵화에 등장하는 금강산마냥 깊은 굴곡과 은은하게 변하는 명도가 웅장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새부랑바위, 부채바위, 장수바위 등 저마다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암초 한 무더기에 명산이 서고 협곡이 파였다.

새부랑바위를 지나 소돌항의 짧은 백사장을 건너면 아들바위공원이 기다리고 있다. 바람과 파도가 완성한 기암괴석 공원이다. 해저 암석층이 1억5,000만 년 전 쥐라기 시대에 융기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 끝에 해식 동굴과 바위 아치가 즐비한 천연 공원이 됐다. 징검다리처럼 바위가 촘촘히 갈라진 넓은 평지가 있어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오르는 방문객이 많다. 일대 이름의 유래가 된 ‘아들바위’는 거대한 바위기둥 한가운데가 뚫려 있어 마치 코끼리 코처럼 독특한 모습이다. 오래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이곳에서 100일간 기도한 끝에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전히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소원을 빌러 온다.


고요하고 청아한 겨울바다

강원 강릉시 소돌해변(왼쪽)부터 시작해 향호해변을 거쳐 양양군 남애항까지 이어지는 5km 길이의 백사장.
향호해변에 설치된 BTS 버스정류장.

아들바위를 돌아 전진하면 소돌해변을 시작으로 5㎞에 달하는 끝없는 백사장이 펼쳐진다. 시원한 겨울바다를 걷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 잘 닦인 도로를 걸어도 1시간 넘게 소요되는 거리다. 주위 경치를 감상하며 푹신한 모래 위를 걷는다면 시간이 족히 배는 필요하다. 원경부터 촘촘히 겹쳐 몰려드는 파도와 티없이 맑은 물빛이 심신을 탁 틔워준다. 하나둘 저마다 작은 점을 이뤄 걷는 이들 모두 즐길 바다가 충분해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백사장 일부는 주문진 유일의 석호, 향호(香湖)를 마주보는 향호해변인데, 이곳에 ‘BTS 버스정류장’이 있다. 2017년 발매된 방탄소년단(BTS) 2집 앨범 ‘YOU NEVER WALK ALONE’의 커버가 촬영된 곳이다. 사진 속 버스정류장은 촬영용으로 세워졌다가 해체됐지만, BTS의 인기몰이 후 강릉시에서 복원했다. 모래사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버스정류장의 정취가 매력적이라 BTS 팬을 포함해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명소다. 인근 하얀 줄그네도 포토제닉하다. 정류장 길 건너편 향호 주위로 소나무숲이 있어 호수, 숲, 바다의 경치가 한데 어우러진다.

강원 속초시 등대해변 백사장에 맑은 바닷물이 밀려들고 있다.
등대해변 인근 건물에서 바라본 속초등대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속초시로 진입했다. 주요 관광지인 동명항과 중앙시장을 조금만 벗어나 북쪽 해안으로 향하면 ‘등대해변’이라는 아담하고 한적한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인근에 서 있는 하얗고 날씬한 속초등대 덕분에 붙은 이름이다. 약 600m 길이의 작은 백사장은 찾는 발길이 뜸해 사시사철 고요하고 한적하다. 겨울철에는 차가운 해풍 속 잔잔한 파도 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아 더욱 쓸쓸하고도 운치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이 해변의 백미는 새벽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일출 광경이다. 수평선 위로 솟는 태양과 푸른 동해, 그리고 흰색 등대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연중 번잡한 동명항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 등대해변이다. 동명항의 끝 영금정에서 도보로 10분만 걸으면 도착한다. 주문진 일대보다 작은 해변이지만 더 전원적이다. 이미 맑디맑은 동해의 물이 더 맑아질 수 있나 싶었지만 이곳의 물이 미묘하게 더 청아한 듯하다. 여름에도 다른 유명 해수욕장보다 덜 붐빈다고 하니 기억해 뒀다 가볼 법하다.

강원 고성군 송지호해변 끄트머리에 죽도가 보인다.
초록빛 송지호쉼터와 푸른빛 송지호해변이 조화로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대한민국 최북단 고성군으로 넘어가면 동해안의 대표적인 석호이자 고성팔경(八景) 중 하나로 꼽히는 송지호(松池湖)에 닿는다. 송지호는 둘레가 약 6㎞에 달하는 넓고 잔잔한 천연 호수다. 호수 사이에 반도 모양의 땅이 튀어나와 서투른 데칼코마니 같은 모습이다. 호수 동쪽 모래언덕이 육지와 바다 사이를 막아 만들어진 해변이 송지호해변으로, 길이 약 2㎞에 폭 100m에 달한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는 울창한 소나무숲과 갈대밭이 길게 늘어서 있다. 호수 너머로는 육중한 산맥이 자리 잡았다. 겨울철새 고니의 도래지로 운이 좋으면 고니 떼를 목격할 수도 있다. 고요한 호수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가 공존하는 풍경은 동해 겨울바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호수와 관련된 전승에 따르면 송지호는 본래 지역 유지의 넓은 논밭이었다고 한다. ‘정거재’라 불린 욕심 많은 지주는 어느 날 찾아온 늙은 승려의 시주를 거절하고 오물을 끼얹으며 모욕했다. 그러자 승려는 “부디 복 많이 받으시오”라고 외며 사라졌다. 승려가 사라지자 하늘이 노한 듯 몇날며칠 폭우가 퍼부었고 지주의 넓은 땅은 죄다 수몰돼 호수가 됐는데, 그 호수가 송지호라는 것이다. 다른 설화에 따르면 승려가 쇠절구를 던지자 절구에서 물이 샘솟아 이윽고 호수가 됐다고 한다. 이 설화 덕에 송지호 기슭에는 서낭바위가 남아 있다고 한다. 탐욕을 경계하고 마을을 지키고자 주민들이 치성을 드리는 바위다.

강릉 소돌해변을 찾은 관광객들이 겨울바다를 즐기고 있다.
속초 등대해변 백사장에 하얀 물거품이 일고 있다.

강릉·속초·고성=글·사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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