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동맹 신뢰’ 중국과는 ‘협력 공간’…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라”[마가와 굴기 넘어⑦]
외교안보·경제안보 전문가 18명 설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전후 80년 세계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미 빈사 상태에 빠진 유엔과 자유무역 규범, 국제법상 타국 주권존중 원칙 등을 대신해 ‘내 도덕성만이 나를 견제한다’는 돈로독트린(몬로독트린과 도널드 트럼프의 합성어)이 군림하고 있다. 연초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영토인 그린란드 장악에 반대하는 유럽국들을 위협하는 미국의 행보는 동맹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은 핵을 포함한 군사력을 빠르게 증강하며, 국가·민간 자원을 총동원해 인공지능(AI)을 위시한 첨단기술 및 산업 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대일 희토류 수출통제 발표는 중국의 자원 무기화와 경제적 강압이 언제라도 우리를 향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달 초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야 한다”며 에둘러 압박하기도 했다.
오는 4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중이 패권 경쟁 격화로 치달을지 아니면 ‘빅딜’에 따른 이익 배분과 영향권 조정으로 나아갈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자국 우선주의가 지배하는 강대국 경쟁 시대에 한국과 같은 중견국들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정부의 대통령마저 ‘안미경중’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2025년 8월 한·미 정상회담)한 지금, 한국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할까. 경향신문은 외교안보·경제·기술 전문가 18명을 상대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설문을 실시했다. 설문은 객관식·주관식 문항 각 11개씩으로 이뤄졌다.

실용외교엔 대체로 후한 점수
중국 견제 쏠림 ‘선 지켜야’ 목소리
일 ‘협력 확대’ 북, 러와 ‘관계 회복’ 주문
이재명 정부가 표방하는 ‘실용외교’ 전반에 대한 평가를 10점 척도(0점은 매우 부정, 10점은 매우 긍정)로 묻자 평균 7.89점이 나왔다. 8점 이상을 준 응답자는 13명(72%)이었다.
지난해 11월 한·미 공동 팩트시트를 포함한 대미 외교에 대한 평가도 7.83점으로 높게 나타났다. 한·중 정상회담의 경우 7.33점이었다.
다만 3500억 달러 대미투자 펀드를 골자로 하는 관세협상 결과가 한국에 경제적 부담을 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12명이 7점 이상을 주며 우려를 나타냈다.
향후 실용외교의 핵심 과제로는 미·중 사이에 낀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섬세한 전략과 함께 자율성 확보가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김형진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연구원 객원연구위원(전 국가안보실 2차장)은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을 받으면서도 가능한 한 ‘이익의 균형’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평가하면서 대중국 정책 공조에서도 적절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전 차장은 “동맹국으로서 미국과 같이 간다는 신뢰감을 주면서도 (중국 견제 관련) 굳이 대외적으로 부각하지 않으면서 중국과 같이 지낼 공간도 남겨둬야 한다”며 “이제는 대미 정책과 대중 정책은 짝을 이루어 검토해야 하는 시대로, 민생이나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과의 협력 사안을 다원화해 선택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전 국방부 기획조정실장)은 “우리 입장에선 역내 세력균형이 급속하게 (중국 쪽으로) 기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미국과 기조를 같이 하되 지나치게 중국 견제로 쏠리지 않도록 선을 지켜야 한다. 한반도 안정·평화, 핵확산 방지가 미국에도 중요한 과제임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형필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동맹 네트워크를 통해 안보 비용을 절감하면서 경제를 발전시켜온 기본 전략은 아직 유효하지만, 미래 안보 환경의 불안정성, 미·중 경쟁 장기화 등을 고려하면 헤징(위험분산)도 필요하다”며 “국방 역량 투자 등을 통해 스스로 전략적 자율성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협력도 과제로 거론됐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일본과 (과거사 등) 풀리지 않는 문제가 불거질 때 역대 진보·보수 정부처럼 이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한·일 협력 지속을 강조했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문제연구소장은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 강화에 상응해 중·러와의 관계도 안정화시키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서 한·러 관계 회복을 주문했다.
또한 국제정세 변화 속에 눈앞의 ‘실리’에만 치우치지 않는 외교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 세계는 더 이상 단극체제가 아닌, 신냉전 구도에서 강대국 간 세력권 게임이 시작된 상황”이라며 “중견국 한국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영희 충남대 평화안보연구소 연구위원은 “미·중 경쟁 속 같은 처지의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는 다층적 외교”를 강조하면서 “실용외교가 기회주의적이라는 오명을 피하려면 실리와 가치 사이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조형진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도 “미·중과는 독립적으로 보편 가치를 옹호하고 독자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만 등 분쟁 과도한 연루 경계
북핵 해법·한국 핵능력 확보엔 의견 갈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있는 ‘동맹현대화’ 논의는 미국이 대중 억제에 집중하기 위해 주한미군 역할·태세를 조정하고, 한국은 대북 억제를 주도하며 방위 분담을 늘려야 한다는 구상을 핵심으로 한다. 23일(현지시간) 발표된 미국의 새 국방전략(NDS)도 한국이 대북 억제에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정부는 이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국방력 강화 등 ‘기회’로 인식하지만 미국의 중국 견제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되는 ‘위험’도 동시에 존재한다.
한국이 당면한 첫번째 국방과제로는 단연 대북 억제력과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가 꼽혔다. 박원곤 교수는 “북핵 위협은 재래식 전력만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포함해 확장억제를 더욱 고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북) 탐지능력 및 미사일 방어 능력 강화”(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남북 간 우발적 분쟁 가능성 최소화”(황지환 서울시립대 교수)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확대는 구조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 됐다는 게 대체적인 인식이었다. 이에 특히 대만해협에서의 미·중 충돌 시 북한 공격 억제와 한반도 안정이 최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과도한 ‘연루’ 위험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최우선 교수는 미 공군 전력이 한국 내 기지에서 직접 발진할 경우 중국의 보복 및 북한 공격 우려가 있다면서 “한·미가 사전 협의를 통해 대만 위기 시 미군 전력 일부를 일본에 이동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득이한 경우 미국과의 협력 수준은 “정보 협력, 보급 지원, 경제제재 동참” 등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왔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비핵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긍정 의견(7점 이상)이 6명, 부정 의견(1~4점)이 8명으로 나뉘었다.
트럼프 2기에서 북·미 대화 재개시 먼저 다뤄야 할 의제에 대한 견해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비핵화, 군비통제 등 북핵 의제가 가장 많이 뽑혔지만, 북·미관계 정상화, 대북 관여·협력, 소통채널 구축 등도 언급됐다. 전문가그룹 내에서 대북정책의 전략적 우선순위에 대한 시각차가 뚜렷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핵 해법을 우선시한 전문가들은 북한 핵 개발 프로그램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동결 조치가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김형진 전 차장은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미 간 포괄적인 로드맵을 구체화한 뒤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는 “대북정책이 여전히 과도한 기대에 기초해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며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지원이나 소통채널 복구와 같은 현실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북핵 위협 대응 차원에서 한국의 ‘잠재적 핵 능력’ 확보 및 검토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 11명(61%)이 6점 이상을 부여했다. 긍정 의견(7점 이상)이 8명으로 부정 의견(1~4점) 4명보다 많았다. 비핵화 달성이 요원해지면서 일정 수준의 ‘핵 자강론’ 추구가 불가피해졌다는 인식이 자리잡았음을 드러낸다.
이는 특히 트럼프 하 미국의 동맹방위 공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와 맞물려 있다. 황태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확장억제가 작동하는 한 독자 핵무장은 불필요하지만, 확장억제 신뢰성이 낮아질 때를 대비해 잠재적 핵능력 확보를 통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수의 전문가가 독자 핵무장 추진에는 선을 그었지만, 우라늄 농축·재처리 권한 확보는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핵추진잠수함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조비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팩트시트에 ‘한·미 원자력협정과 미국 국내법 틀 내’라는 명확한 현상유지 조항이 담긴 만큼 전향적인 발전이 어려울 것”이라며 “무인잠수정, 수중드론 등 한국이 필요로 하는 핵심 전력의 공동생산·획득에 주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차태서 교수는 “핵잠 도입의 국가전략상 목표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미국의 바람대로 중국을 겨냥한 전략무기를 들여오면서 미·중 사이 다리(bridge) 역할을 꿈꾸고 남북평화도 추구한다는 정부의 설명이 잘 납득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이 서해 잠정조치수역(PMZ) 내에 무단 설치한 대형 구조물 문제는 한·중 간 잠재적 갈등 요인이다. 양국이 이달 정상회담에서 실무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지만 중국의 남중국해 내해화 시도에서 보듯이 서해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비연 연구위원은 “미·중 경쟁 구도에서 중국은 서해를 요충지로 여길 것”이라며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응하되 서해구조물의 경우 외교적으로 접근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과학 인재·AI 육성 정책엔 쓴소리
첨단기술과 기초과학 균형 발전 필요
중국과 협력·경쟁 분야 구분해 대응해야
외교 분야와 비교해 정부의 첨단 기술·산업 및 이공계 인재 정책에 대한 평가는 저조했다. 과학기술 인재 확보 및 양성 정책은 평균 5.83점을 기록했다.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준 응답자도 6명이나 됐다. ‘AI 3강’, ‘소버린 AI’ 등 정부의 AI 육성 전략은 6.72점, 첨단산업 공급망 보호 정책은 6.55점을 받는 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인재를 위한 아낌없는 대우와 적극적인 유치 전략을 주문했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는 “(AI 관련) 학과 증설 등 숫자에 치우친 정책이 아닌 차별화된 소수의 전문인재 양성에 초점을 둬야 한다”면서 “우수 외국 인력의 한국 유치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른바 기술유출 혐의로 기업 입장을 강화하는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게 먼저”라며 “과학기술 인재들의 직업선택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는 한편, 잔류를 선택하도록 하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긴 안목에서 과학기술 연구가 꽃필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미 반도체 기업 근무, 중국 칭화대 교수를 거쳐 지난해 귀국한 이우근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지속적인 연구 환경 제공”을 첫번째 과제로 꼽으며 “첨단기술과 기초과학의 균형있는 발전”을 강조했다. 서용석 KAIST 교수도 “기술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인재 양성 정책, 기초학문 분야 투자 확대, 과학기술자가 존중받는 사회환경 조성”을 거론했다.
미국, 중국과의 첨단기술 협력 방향에 대해선 미·중 기술 패권경쟁과 공급망 재편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면서 실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제언이 주를 이뤘다. 특히 중국과는 고도로 민감한 핵심 기술과 무역·경제 협력을 분리해서 대응하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욱연 교수는 “중국과는 협력 분야와 경쟁 분야를 구분해 대응하고, 미국과는 많은 분야에서 협력하되 철저하게 한국 국익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만수 위원은 “중국이 선도하고 있는 첨단기술을 접목한 신산업 분야를 학습, 흡수하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면서도 “중간재·부품의 중국 수입 의존도는 대중 수출 의존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므로 소·부·장 육성 등을 통해 이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과의 첨단기술 협력을 전폭 확대하되 협상 지렛대 차원에서 제3국 연대 및 ‘소다자 체계’를 구축해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중국과는 지식재산권 보호를 전제로 현지 대학·중소기업과의 R&D(연구개발) 협력을 확대하고 로봇, 바이오 등 신산업 공급망 협력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설문 참여자(ㄱㄴㄷ순)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김형진 전 국가안보실 2차장,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안유화 중국증권행정연구원 원장, 여영준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이우근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 이욱연 서강대 중국문화학 교수, 이현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장영희 충남대 평화안보연구소 연구위원, 조비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조형진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우선 국립외교원 교수, 황지환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황태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신주영 기자 j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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