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호남 이전론 들었다면
결국은 기업에 큰 부담 떠넘겨
국가-기업 간 신뢰 희생시키면
균형 발전이란 명분도 무의미
삼성전자 주가에 주주들은 환호하지만, 정작 삼성전자 경영진의 표정은 밝지 않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 때문이다. ‘호남 이전이 윤석열 내란 종식’이라는 일부 의원들의 과격한 구호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정리가 끝난 듯하면서도 끝나지 않은, 대통령의 모호한 메시지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기업을 옮기라 마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논란에 명쾌한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균형 발전과 에너지 수급을 위해 정부가 설득하거나 유도할 수는 있다”는 말이 뒤따랐다. 전면 이전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전 논의는 끝났다’고 선을 긋지도 않은 셈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내부에서도 삼성전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체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누구도 이를 공식화하지는 않는다. 호남 여론과 표심을 의식한 정치적 계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공은 삼성전자 쪽으로 넘어갔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뭔가는 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우회적 기대와 압박이 남아 있는 형국이다. 기업이 알아서 기면 더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꽃놀이패’나 다름없다.
이 애매한 국면이 삼성전자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토지 보상을 맡은 공기업 LH(한국토지주택공사), 전력 공급 문제의 열쇠를 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 대통령이 “이전은 없다”고 명확히 정리하지 않는 한, 공기업과 관계 부처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삼성으로서는 서두를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은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 발전이다. 낙후된 호남 경제를 살리고,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으로 전력 다소비 업종을 분산하자는 주장 자체는 옳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번 논란은 국가-기업 간 ‘신뢰’가 걸린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 산업계에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다.
기업은 정책 일관성을 믿고 수십 년이 걸릴 장기 투자를 결정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지난 정부에서 승인받아 이미 수조 원의 토지 보상과 관련 인허가 절차가 진행 중인 국책 사업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판을 흔든다면 앞으로 어떤 기업이 정부 약속을 믿고 투자 결정을 하겠는가. 매몰 비용과 법적 분쟁은 차치하고라도, 정책 불확실성이라는 리스크를 정부가 스스로 키우는 꼴이다. 기업 경쟁력과 주가에도 악재다. K-반도체의 경쟁자만 좋은 일 시키는 결과다.
삼성전자가 벌이는 글로벌 초격차 경쟁은 한 번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다. 세계 반도체 수급 사이클은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 AI(인공지능) 붐을 탄 반도체 수퍼 사이클을 놓치지 않으려면 하루가 아쉽다. 타이밍을 놓치면 투자는 ‘올스톱’이다. 안 그래도 한국 기업을 겨냥해 ‘미국에 공장 세우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거세다. 국내 정치에 발목 잡힌 삼성전자가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돌아서면 어찌 막을 건가. 모두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삼성전자를 세계 1등으로 만든 고(故) 이건희 회장은 거침없는 직설로 유명했다. 생전의 그였다면 이렇게 일갈하지 않았을까. “지금 1등 하던 놈도 까딱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판에, 반도체 공장이 어디 유권자 표 주워 담는 소쿠린 줄 압니까? 앞에서는 ‘니들 맘대로 하라’ 점잖은 척해 놓고 뒤로는 옆구리 쿡쿡 찌르며 딴소리하는 거, 지도자들이 할 일입니까? 기업 들러리 세워 표밭도 일구고 선거도 이기면서 세계 1등 지켜주겠다고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갖고 가서 한번 경영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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