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를 찾아서] 서울 양반가의 술, 삼해소주 | 전원생활

길다래 기자 2026. 1. 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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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1월호 기사입니다.

집집이 김치 맛이 다르듯, 본래 우리나라는 집마다 술맛 또한 달랐다. 일제강점기 주세법이 시행되면서 집에서 술을 빚던 가양주 문화는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모든 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어렵게 살아남은 귀한 술을 찾아 나선다. 그 시작으로 서울의 술, 삼해소주를 만났다.
서울 양반가의 술, 삼해소주.
조선 후기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독막 주변에서 삼해주를 수백 수천 독을 빚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독막은 옹기를 굽던 마을을 말하는데, 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과 대흥동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인근에 있는 마포나루는 쌀과 나무 등의 물자가 서울로 들어오는 물류의 요충지였다. 술을 빚는 데 필요한 쌀과 물, 불을 지필 나무, 거기에 술을 발효 숙성할 옹기와 넓은 가마까지 있었으니, 양조가 성행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일까? 재미있게도 오늘날 ‘삼해소주(알코올 도수 45%)’를 빚는 ‘㈜농업회사법인 삼해소주’ 역시 마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제조·판매뿐 아니라 일반인이 삼해소주를 빚어서 가져갈 수 있는 아카데미와, 법인이 생산한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는 시음회 등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삼해소주의 기본이 되는 삼해주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대표적인 서울의 술이다. 약주(맑은 술) 부문은 삼해약주장 권희자 선생이 명예보유자로서 술맛을 지키고 있다. 다만, 판매 목적의 양조는 하지 않는다.

삼해소주를 지키고 있는 김현종 대표.

삼해주를 증류해 만드는 삼해소주는 이동복 선생을 거쳐 그 아들인 김택상 명인에게 이어졌다. 김 명인이 2021년 작고한 뒤로는 명인 생전부터 함께 술을 빚어온 김현종 대표(59)가 삼해소주를 지키고 있다.

“삼해소주는 통천 김씨 집안에 이어져온 술이었어요. 김 명인은 삼청동에서 자그마하게 삼해소주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2016년에 시음하러 갔다가 우연히 같이 일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실질적인 생산을 도맡아온 김 대표는 지금도 삼해소주의 맑고 그윽한 향을 책임지고 있다.

세 번의 해일(亥日)에 빚는 술
삼해주는 이름 그대로, 세 번의 돼지날에 빚는 술이다. 음력 정월 첫 번째 돼지날에 첫술을 빚은 뒤, 36일(혹은 12일)마다 돌아오는 돼지날에 두 번 덧술한다. 술이 완성되기까지 100여 일이 걸려서 ‘백일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12일마다 덧술하는 삼해주를 ‘작은 삼해주’라 일컫기도 하는데, 김현종 대표는 전통 방식인 36일 간격을 지키고 있다.

돼지날을 택한 연유는 무엇일까?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돼지는 12간지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오는, 태평하면서도 복과 행운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 때문에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 숙성하는 삼해주의 성격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삼해주를 빚는 재료는 찹쌀과 멥쌀, 물과 누룩이 전부이다. 삼해소주 법인에서는 김포 쌀을 사용한다. 첫술에는 멥쌀을, 2·3차 덧술에는 찹쌀을 쓴다. 쌀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 삼해주는 다른 탁주나 약주에 비해 시간과 재료가 유독 많이 드는 술이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조 때 형조판서 김동필이 “서울로 들어오는 쌀이 삼해주 만드는 데로 쏠려 들어가니 미곡 정책상 이를 금해야 한다”라고 진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정조는 “술이란 물건은 금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중략) 삼해주가 이미 다 익었으니 이제 와서 이미 다 빚어놓은 술을 공연히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해소주를 증류하는 알람빅 동 증류기.

삼해주는 재료와 시간이 많이 드는 만큼 아무나 마실 수 없었고, 왕과 사대부, 재력이 있는 중인들이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삼해소주는 다른 술에 비해 누룩을 넉넉히 사용한다. 증류를 위한 술이어서, 완전하게 발효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발효가 끝나면 ‘알람빅 동 증류기’로 단식 증류한다. 증류 후에는 병입하고 3~4개월간 자연스럽게 숙성을 거친다. 생산량에 욕심내지 않아서 연간 생산량은 최대 5000병으로 제한한다.

“김 명인 시절부터 지켜오던 원칙이 ‘손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만 하자’는 것이었어요. 같은 재료로 똑같이 담가도 통마다 술맛이 달라져요. 이를 섞어서 좀 더 복잡한 향미를 지닌 술이 완성됩니다.”

삼해주의 재해석
김현종 대표는 삼해소주를 전통 방식 그대로 생산하는 일 못지않게, 삼해주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곳에서 열리는 시음회에서는 삼해 약주 6종과삼해소주 11종을 경험할 수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삼해 포(50%)’는 쌀과 ‘캠벨’ 포도즙, 누룩으로 빚는다. 우리 고문헌에도 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데, 물이 들어갈 자리에 포도즙을 대신 쓴다. 김 대표는 이 방식으로 삼해 포 약주를 빚고, 증류한다.

삼해소주 법인에서 내놓은 다양한 술들.

‘삼해 장천(50%)’은 삼해소주 라벨 글씨를 쓴 김성태 작가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김성태 작가는 서예가이자 우리나라 1세대 캘리그라피 작가로, 교양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영화 <서울의 봄> 등의 제목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해소주의 오랜 팬이어서 흔쾌히 라벨 글씨를 맡아주었다고 한다. 삼해 장천은 햇볕에 말린 유기농 유자진피차를 우려내 물 대신 사용한다.

다른 술은 몰라도 시음회에서 꼭 마시고 가야 한다는, 애주가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술도 있다. 바로 ‘삼해귀주(71.2%)’이다. 삼해귀주는 삼해소주를 한 번 더 증류해서 더욱 깊고 화려한 풍미를 선보인다. ‘사람은 귀신이 되고, 귀신은 사람이 되는 술’이라는 뜻으로 ‘귀신 귀(鬼)’ 자를 썼다. 귀신같은 술이라니, 짜릿함이 배가된다.

총 17종의 술을 맛보는 사이 시음회에 참가한 사람들 얼굴이 붉게 물든다. 쌀의 달고 구수한 맛에 누룩의 복잡한 뉘앙스, 알코올의 매운맛이 더해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흥취를 전한다. 공통된 감상은 “도수가 높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빚은 약주는 보통 알코올 도수가 15~18%에 이르고, 소주는 주로 45~50%이다. 희석식 소주와 도수가 비슷하거나 더 높은데도 그만큼 목 넘김이 부드럽다는 의미이겠다.삼해소주는 인터넷에서 판매하지만, 나머지 술들은 삼해소주 양조장에서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곁들이면 좋을 안주를 물었다.

“위스키 같은 술을 마실 때 안주 없이 마시지 않나요? 우리 술도 그 자체로 즐기면 좋겠어요. 식사에 곁들인다면 담백한 쇠고기가 좋고, 중국 백주와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기름진 음식과도 잘 어울립니다.

”2026년 새해를 여는 자리. 사대부의 귀한 술 한 병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눠보면 어떨까. 설날 떡만둣국 한 그릇에 삼해소주 한 잔 기울이면 몸과 마음이 정갈해지고, 따스한 온기가 차오른다.

길다래 기자(전통주 소믈리에) | 사진 전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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