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앞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비명… 참호 속 관객도 전쟁 참상 맞닥뜨려
1차 세계대전 배경으로 고전 재해석
포탄 떨어지는 굉음과 진동이 바닥을 통해 몸을 타고 올라온다. 그때마다 천장에서 모래흙이 흘러내린다. 군인만 약 1000만명이 사망한 1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유럽 서부전선. 비좁은 참호 속에 바깥바람이 들이치면, 벽에 걸린 죽은 전우들의 군번줄이 서로 부딪혀 풍경 소리를 낸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관객은 목재로 얽어 세운 좁은 복도를 지나 이 참호 속으로 들어선다. 폐소공포증에 숨이 막힐 듯 어두운 극장 속, 배우들의 거친 숨소리와 비명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아더왕 전설 속 마녀 ‘모르가나’,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셰익스피어 비극 속 장군 ‘맥베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 비극 속 왕 ‘아가멤논’…. 고전의 플롯과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각각 75분 안팎 길이 세 편의 작품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 ‘벙커 트릴로지(3부작)’가 완성된다. 각각 완성된 이야기인 세 연극은 매일 같은 장소에서 공연된다.
‘전쟁에서 첫 번째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진실’이라고 어느 그리스 비극의 작가는 말했다. 이 3부작의 각각은 전쟁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성의 여러 얼굴을 비춘다. ‘모르가나’에서 세 병사는 서로를 아더왕 전설 속 이름 ‘아더왕’ ‘랜슬롯’ ‘가웨인’으로 부른다. 콘월의 명문 사립학교에 함께 다닐 때부터 그랬지만, 원탁의 기사 이름을 가진 친구 10명은 이미 전사했다. 죽은 친구의 휘파람 소리가 자꾸만 들려오고, 이들은 고개만 들어도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위를 걷는 여자를 본다. 이 여자는 현실일까 아니면 아더왕 전설 속 마녀 ‘모르가나’일까.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조여오는데, 그 속에 각자의 현실과 환상이 엇갈리고 스며든다.
‘맥베스’에선 전공에 눈이 멀어 평민 병사들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희생시키던 귀족 장군을 죽인 장교가 전선의 사령관이 되지만, 그 역시 병사들을 체스 말처럼 버리려 하다 살해당한다. ‘아가멤논’에선 독일군 최고 저격수와 전쟁 전 그와 결혼해 독일 후방에 남겨진 영국인 아내의 비극이 관객의 가슴을 저민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뒤 이듬해 호주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 연극상을 받은 작품. 2016년 국내 라이선스 초연, 2018년 재연에 이어 이번 공연도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 연건동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3월 2일까지, 각 편당 전석 5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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