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위에 아로새긴 시간의 흔적들…故최병소 작가 첫 회고전

김경미 기자 2026. 1. 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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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의 새하얀 벽 위로 모노크롬 추상을 연상시키는 흑백의 작품 두 점이 나란히 걸렸다.

다 쓴 볼펜이 지나가며 남긴 너덜너덜한 상처와 균열 위로 선을 그은 작가의 시간과 상념이 내려앉았다.

신문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그어 완성한 '검은 그림'으로 잘 알려진 최병소(1943~2025) 작가의 회고전 '무제(Untitled)'가 서울 신사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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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수만번 그어내린 검은 화면
“나를 지우는 일” 침묵·저항 담아내
생애 마지막 10년간 작품 21점 전시
신사동 페로탕 서울서 3월 7일까지
서울 신사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최병소 작가의 개인전 ‘무제(Untitled)’의 전시 전경 /사진제공=페로탕서울


전시장의 새하얀 벽 위로 모노크롬 추상을 연상시키는 흑백의 작품 두 점이 나란히 걸렸다. 얼핏 두터운 물감이 올라간 회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반전이 있다. 칠흑같이 검은 화면은 회색빛 신문지 위를 검은 연필과 볼펜으로 끝없이 긋고 눌러 종이 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기록이다. 백색 화면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신문 용지에 다 쓴 볼펜을 수천, 수만 번 그어내린 흔적이다. 다 쓴 볼펜이 지나가며 남긴 너덜너덜한 상처와 균열 위로 선을 그은 작가의 시간과 상념이 내려앉았다.

신문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그어 완성한 ‘검은 그림’으로 잘 알려진 최병소(1943~2025) 작가의 회고전 ‘무제(Untitled)’가 서울 신사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글로벌 메가 갤러리 페로탕의 올해 첫 서울 전시이자 최 작가가 지난해 82세의 일기로 별세한 후 처음 열리는 회고전이다.

최병소 작가 /사진제공=페로탕 서울


최병소, 무제 0230305(2023) /사진제공=페로탕서울


최병소, 무제 0221206, 2022 /사진제공=페로탕서울


50여 년간 이어진 작가의 ‘신문 지우기’ 작업은 ‘왜’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을 낳았고 그만큼 해석도 다양했다. 30대 청년 작가였던 1970년대에 시작한 이 작업을 두고 처음에는 ‘유신과 검열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물자가 부족했던 한국전쟁 직후 학교를 다녔던 작가가 신문 용지로 제작한 교과서를 헤지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쓰던 기억에서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시간이 흐르고 노년이 됐을 무렵 작가는 “나를 지우고 정화하는 일”이라고 답을 했다. 일각에서는 매스미디어가 생산하는 과잉 언어들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환경에서 글자를 지우는 작업을 통해 삶의 의미와 본질, 존재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실존을 깨우치는 작업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제는 묻기 어려워진 ‘왜’에 대한 답은 이 모든 해석의 총합 어디쯤 있을 것이다. 청년의 저항 정신에서 출발한 여정은 시간의 축적과 함께 침묵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볼펜과 연필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덮어 의미를 해체하던 행위 역시 시간이 흐르며 물성 그 자체의 변화를 탐구하는 명상적 수행으로 변모했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의 작품 21점이 내걸렸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등 주요 신문의 제호만 남긴 채 먹빛 침묵으로 뒤덮어버린 대표작부터 아무 글씨도 없는 백지를 다 쓴 볼펜의 흔적으로 채운 말년작까지, 반생에 걸쳐 종이 위로 지우고 긋기만을 반복해온 한 예술가의 삶의 여정을 만나볼 수 있다. 종이에 선을 긋는 이 단순한 행위가 한국 현대미술사에 그린 고유한 궤적을 되짚어보는 것도 좋겠다. 전시는 3월 7일까지.

김경미 기자 km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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