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노인의 돈은 왜 쓰지 못하거나 빼앗길까

황교진 기자 2026. 1. 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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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저하 앞에서 멈추는 계좌, 작동하지 않는 자산 보호
‘치매머니’가 아닌 ‘인지보호자산’의 관점에서 본 자산 관리의 공백

아침마다 동네 은행을 찾던 어르신이 있었다. 연금과 생활비, 병원비까지 30년 넘게 같은 계좌로 관리해 왔다. 치매 진단을 받은 뒤 요양병원 입소를 앞두고 요양비 100만 원을 이체하려 했지만, 창구에서는 본인 의사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거래가 중단됐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자금 부족이 아니라 사용 여부 자체가 판단 대상이 된 상황에 부닥쳤다. 진단서 한 장이 계좌의 성격을 바꿔 놓은 순간이었다.

치매는 기억과 판단을 흐리게 하지만, 그 여파는 곧바로 금융 영역으로 이어진다. 언제, 누구의 판단으로, 어떤 비용을 집행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해지면서 자산은 더 이상 개인의 재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시점부터 자산은 인지기능 저하라는 위험을 전제로 관리돼야 할 대상으로 보호와 개입의 기준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치매 진단 이후, 계좌는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할까 / 생성형 AI

의료비 인출은 제도화됐지만, 적용 범위는 제한적

금융당국과 은행권이 가장 먼저 손댄 영역은 의료비였다. 거동이 어렵거나 의식이 없는 예금주를 대신해 치료 목적 비용을 의료기관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절차를 정비했다. 긴급 수술비에 한정됐던 범위를 입원비·검사비 등으로 넓히고, 요양병원과 요양원까지 포함했다. 현장에서는 "치료비 지급을 둘러싼 혼선이 일정 부분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치매 이후 자산 문제가 드러나는 여러 국면 가운데, 의료비 지급은 가장 앞단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실제 돌봄의 무게는 병원 밖에서 커진다. 간병비, 생활 지원 비용, 주거 전환 과정의 비용, 각종 비급여 지출은 여전히 누가 판단하고 집행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놓인다. 이 지점에서 제도는 아직 일관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의 망설임, 권리와 보호 사이

가족들은 묻는다. 치매 진단서까지 제출했는데 왜 거래가 매번 진행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은행의 입장에서 인지기능 저하 상태의 금융거래는 사후에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무효 논란이 불거지면 책임이 금융기관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치매를 이유로 일률적인 제한을 두면 차별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이처럼 권리 보호와 위험 관리 사이에서 은행은 보수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명확한 법적 권한이 없는 한, 결정을 미루거나 다음 단계로 넘기는 선택이 반복된다. 그다음 단계로 제시되는 해법이 '성년후견'이다.

후견과 신탁, 존재와 작동의 간극

성년후견은 현재로선 가장 분명한 법적 장치다. 판단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면 법원이 선임한 후견인을 통해 자산 관리와 의사결정을 맡길 수 있다. 그러나 후견은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고, 가족 간 갈등이 얽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후견이 개시되기 전까지의 공백은 그대로 남는다.

특히 겉으로는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판단력만 흐려진 초기 단계에서는 인출을 잠시 지연하거나 가족에게 알림을 보내는 수준의 완충 장치조차 제도화돼 있지 않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치매 발병 이전을 전제로 한 이른바 '치매안심신탁'도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비용 부담과 접근성 문제 때문에 제한적으로 활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험이 가시화된 이후에 접근하기에는 문턱이 높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인지기능 저하 고령자의 자산 규모가 상당함에도, 후견이나 신탁 등 제도적 보호 장치 안으로 들어온 비중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고 말한다. 상당수 자산은 보호와 방치의 경계에서 개인과 가족의 판단에 맡겨져 있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나 금융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실제로 가족 내부의 경제적 착취나 부적절한 자산 처분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판단 능력 저하와 함께 자산은 공적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이유로 치매 이후의 자산은 인지기능 저하를 전제로 보호와 개입의 기준이 요구되는 영역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디멘시아뉴스는 이 자산을 '치매머니'가 아니라, 사전 설계와 단계적 개입이 필요한 '인지보호자산'으로 호칭하자고 제안해 왔다.

현장은 이미 제도의 공백을 감당하고 있다. 한 치매안심센터 관계자는 "요양병원이나 시설에 입소한 무연고 어르신의 경우, 통장 비밀번호를 알 수 없으면 급여관리자 지정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며, "병원비는 당사자 채무인데도 누구도 합법적으로 집행할 수 없어 미납으로 남는 사례가 반복된다"고 말했다. 

금융 현장에서도 "치료비는 직접 지급이 가능해졌지만, 간병비나 생활비처럼 개인에게 지급되는 비용은 후견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제도화돼 있다. 일본은 판단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기 이전 단계부터 개입하는 '일상생활 자립지원사업'을 통해, 소액 자금 관리와 의료비·공과금 지급을 공공이 보조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성년후견이 개시된 이후에도 후견제도 지원예금이나 지원신탁을 활용해 후견인이 자산을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통제 장치를 두고 있다. 후견 이전과 이후를 나눠 단계적으로 설계한 점이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다.

영국은 인지기능이 유지될 때 미리 법적 위임을 설정하는 'LPA 제도(Lasting Power of Attorney, 지속 위임장)'를 통해 사후 분쟁을 줄이고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사고 이후 개입이 아니라 판단 능력이 흔들리기 이전부터 단계적으로 설계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치매는 개인의 질병이지만, 치매 이후의 자산 문제는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문제는 자산을 묶을 것인가 풀 것인가가 아니다. 언제, 누가, 어떤 기준으로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장치가 아직 준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장은 그 공백을 버텨내고 있다. 이제 제도가 그 현실을 따라가야 할 차례다. 진단서 한 장이 계좌를 멈추게 하는 대신 그 계좌가 노후의 마지막 방어선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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