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 찍던 소년이 ‘삶’을 마주했을 때
새미의 세계 이해 도구 ‘카메라’
‘시네마 천국’ 소년 토토 연상케
개인의 삶과 가족·성장사 주목
특유 엔딩숏·카메라 워크 ‘압권’
관객에게 선사하는 설렘·경외
“누구나 인생이 긴 영화” 메시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던 가장 최초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어림잡아 20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가 스크린을 올려다보던 그날, 기억 속 첫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였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왕의 남자’가 품고 있던 방대한 서사와 플롯,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온전히 읽힐 리는 없었다. 그러나 조그만 키보다 몇 배는 더 큰 스크린 속에 몇 배는 더 큰 사람들이 나와 열연을 펼치는 게 상당히 파격적인 기억이었다.
비슷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 속에는 정말로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반대로 극장 스크린 안에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존재들이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시절 보았던 영화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고소한 팝콘 냄새가 극장 안에 가득 퍼진 가운데 부모님 사이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화면을 바라보던 추억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카메라는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주인공 새미 파벨만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본 이후, 문자 그대로 영화와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 버트의 카메라를 들고 여동생들과 찍은 홈비디오를 벽장 속에 쭈그려 앉아 재생하던 취미는 학창 시절에 이르러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단계로 확장된다. 카메라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새미가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영화를 향한 새미의 거의 일방적인 사랑은 ‘시네마 천국’(1988)에 등장하는 토토를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영사기 앞에 앉아 영화를 지켜보던 토토와 달리 새미는 주로 카메라 뒤에 서 있지만 성별과 인종, 세대의 차이를 넘어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강렬하고도 사적인 기억을 남겨왔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파벨만스’는 이들 영화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택한다. 표면적으로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개인의 삶과 가족, 그리고 성장을 들여다본다.
특히 새미의 어머니 미셸과 아버지의 절친 베니의 관계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작품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새미의 시선은 불안과 혼란, 내적 갈등으로 복잡하게 뒤엉킨다.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캠핑 여행을 카메라에 담았던 새미는 여행 이후 필름을 넘겨보는 과정에서 아무도 알지 못했던 엄마와 베니 삼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낸다. 카메라는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새미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배신감이나 분노로 환원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장 다정했던 엄마가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로서는 불완전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빠진다. ‘좋은 엄마’와 ‘좋은 아내’는 반드시 같은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관객에게도 윤리적·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아주 지루할지라도, 나의 영화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자신이 어떻게 거장 감독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도, 단순한 ‘영화를 사랑하라’는 선언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지난한 인생 자체가 한 편의 긴 영화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필름에 담겨 있지 않을 뿐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삶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시선, 혹은 세계라는 렌즈 안에서 연기하듯 살아간다. 크고 작은 굴곡이 반복되고, 좌절과 실패를 겪다가도 누군가는 손을 내밀고, 누군가는 짐을 함께 들어준다. 이별과 사랑이 교차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순간과 눈부시게 행복한 순간이 공존한다.
양귀자 작가의 소설 ‘모순’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누군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는 다소 진부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고, 그 영화의 감독도 주인공도 시나리오 작가도 모두 나다. 설령 그게 아주 지루한 감독이 만든 아주 지루한 영화일지라도 말이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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