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입은 무대의 ‘도파민 디톡스’…극장이 경험을 파는 법 [고승희의 리와인드]
베르디 오페라부터 해리포터 콘서트까지
27권의 시집과 접속한 80명의 관객
극장의 경계 허문 파격 실험이자 생존법
![세종문화회관 인스피레이션 ‘리딩 & 리스닝’ 공연은 한국의 시인들과 ‘세종 시즌 2026’ 프로그램을 큐레이션해 선보였다.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6/ned/20260126152849045ttht.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 시에 전에 없던 목소리를 내는 새로운 종족의 등장.”
젊은 시인 신이인을 수식하는 문장을 눈에 담자, 그가 공연 도중 무대로 걸어 나왔다. 객석은 등진 채 80명의 남자, 여자, 중년, 청년, 혹은 아이 앞에서 시를 읽는다. ‘꿈의 고백’이었다.
“친언니가 피자를 사와서 내게 한 조각 먹이고 말했다 /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외계인이었는지도 몰라. (중략) 지구는 재미있구나 가족이 이종족일 수 있다니 / 외로워도 홀로 이종족인 편이 낫겠지.”
‘외계인’, ‘이종족’과 같은 낯선 시어 덕에 시인의 중저음 목소리와는 무관하게 시는 재기발랄하고 귀여워진다. 귀여움이 외로움을 집어삼키진 않았으나, ‘별종’의 ‘별종들’을 향한 시선엔 따뜻한 이해가 담긴다.
이 시가 불시착한 곳은 오는 6월 개막을 앞둔 뮤지컬 ‘더 트라이브’(6월 9~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런던의 한 박물관을 배경으로 성소수자인 남자와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부족’과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담은 뮤지컬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살짝 비켜선 사람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도 값지다는 이야기를 예고하는 완벽한 ‘오프닝’이었다.
세종 인스피레이션 ‘리딩& 리스닝 스테이지’에선 한국의 대표 시인과 ‘세종 시즌 26’의 공연 프로그램을 큐레이션해 선보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애초 4회차로 계획했던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회당 50석이 모두 팔려나가 좌석을 80석으로 늘렸다”고 귀띔했다.
![세종문화회관 ‘리딩 & 리스닝’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6/ned/20260126152849322tuxb.jpg)
100분간 이어지는 공연은 전에 없던 ‘극장 경험’을 안긴다. 무대와 객석을 엄격히 구분하는 액자 모양의 건축 구조인 프로시니엄의 벽을 허물고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렸다. 3000석 규모의 대극장 객석을 텅 비우고 무대 위엔 ‘ㄷ(디귿)’자 형태의 좌석과 27명의 시인, 80권의 시집이 꽂힌 서가를 배치했다.
3열엔 길쭉한 의자를 마련했다. 중앙엔 80명의 관객을 반길 시집들이 꽂힌 책꽂이를 배치해 공연장은 조금 더 낭만적인 분위기의 공간이 됐다. 웅장했던 극장이 순식간에 북카페 혹은 도서관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총 100분 중 중간 30분은 시인의 시 낭송과 대담으로, 앞뒤 70분은 세종문화회관의 라인업을 청각으로 경험하는 ‘리스닝’과 관객 각자가 고른 시집을 알아서 읽는 ‘리딩’으로 채워진다.
문학동네와 협업한 큐레이션엔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공연과 시인의 매치가 흥미롭다. 1986년 한국 초연 이후 40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베르디 대작이자 서울시오페라단의 야심작인 ‘나부코’(4월 9~12일)는 최현우의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와 짝을 이뤘다. 성서 속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서사를 따라가는 오페라판 ‘왕좌의 게임’과 “타인의 슬픔을 나누어지는 바람에 언제나 양어깨가 무거운” 시인의 언어는 꽤 닮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주는 숭고한 슬픔은 시인이 써 내려간 ‘피의 진함보다는 물의 빛남’을 닮은 문장과 공명한다.
서울시발레단이 창단 2주년을 맞아 선보일 더블빌 ‘죽음과 소녀’(8월 15~16일)는 임유영의 ‘오믈렛’과 만났다. 슈베르트의 서정성을 비틀어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춤의 세계를 완성한 크리스티안 슈푹과 알렉산더 에크만의 작품을 나란히 선보이는 무대다. 두 안무가의 파격처럼 시인은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 액체와 고체 그 어디쯤의 식감” 같은 모호하고 비밀스러운 매력을 품는다. “소녀들은 죽음과 눈물과 폭력과 섹스와 오물과 고통을 생각하는 완벽한 방법을 알아낸다. 음악이 시작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세종문화회관 ‘리딩 & 리스닝’ 신이인 시인(오른쬭)과 모더레이터 이단비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6/ned/20260126152849629qnbi.jpg)
‘리딩& 리스닝 스테이지’의 백미는 음악과 텍스트가 충돌하고 스미는 순간이다. 네 개의 주제로 7개의 트랙으로 구성해 선보이는 플레이리스트는 모두 세종문화회관이 올해 계획한 공연 속 음악들이다.
발레(‘트리플 빌 올 포 한스 판 마넨’)에 등장할 존 케이지,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콘서트 곡 중 하나, 정명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협연할 ‘베토벤, 브람스’ 공연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2악장, 서울시발레단 ‘블리스 & 재키’에서 나오는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등을 듣는 동안 관객은 자유자재로 시집을 골라 시를 읽는다. 음악 한 곡이 끝날 때면 조명의 조도와 색감이 은근히 달라지며 환기의 시간을 알린다.
관객은 자기와, 혹은 음악과 딱 맞는 시집을 고르기도 하고 영 맞지 않는 시집을 고를 때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딱 맞는 시집이 나오면 그때부터 다른 감각의 세계로 향하게 된다.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가 긴 호흡으로 이어질 때, 유수연의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안에 자리한 긴 산문시가 눈에 들었다. 문학동네는 이 시집을 송년음악회와 큐레이션 했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유수연의 시를 읽으면 아주 조금 용감해진다”며 “고단한 일상에 딱 한 스푼의 달콤함을 보태어보자고 제안하는 그의 목소리에 설득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채 이어지는 유수연의 산문시는 키스 자렛이 쾰른 오페라하우스에서 쉼 없이 이어간 즉흥 솔로 연주의 변칙과 자유로움이 닮았다. 무대 위에 홀로 뜬 별처럼, 망망대해를 부유하는 조각배처럼 외롭게 어둠을 밝히는 그의 음악은 담백하고 과장하지 않은 은유의 언어로 사색하는 시인과 닮았다. “반짝이면 다 사랑인 줄 알았다(‘종 다양성 슬픔 무성히’ 중),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면 뺏기지 않을 줄 알았어’(‘정중하게 외롭게’ 중) , ‘아무도 없지만 너는 종종 내 옆에 눕고 나는 계속 어떤 문장을 너처럼 안고 잠든다’(‘습작’ 중)와 같은 문장들이다. 느린 호흡으로 문장을 곱씹으며 한 편의 시를 읽는 시간 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중독된 뇌는 ‘도파민 디톡스’를 경험한다.
![세종문화회관 ‘리딩 & 리스닝’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26/ned/20260126152849925pwpi.jpg)
이 이색적인 공연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공연은 평범한 ‘관극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는 세종문화회관이 오는 3월부터 본격적으로 닻을 올릴 ‘2026 세종 시즌’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자, 관객 확장을 위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지금의 공연장은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와 같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경험재와 소비재가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백화점과 호텔과 경쟁해야 한다. 한정된 여가 시간을 다투는 ‘시간 점유 싸움’인 만큼 공연장에서도 더 많은 경험과 감각을 제공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해 ‘세종 인스피레이션’ 시리즈를 통해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 공연이라는 콘텐츠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지난해 4월 최현석 셰프와 협업한 만찬, 서울시무용단의 ‘일무’와 분재 워크숍 등 보고 듣고 마시고 만지는 등 오감을 자극하는 시도로 공연과 극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하고 있다. 이는 극장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적 접점을 확장하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명민한 생존전략이다.
공연계 관계자는 “국내 공연 문화는 대체로 스타 중심으로 티켓 파워가 쏠리는데, 공연장과 콘텐츠가 만나 이색적인 홍보 전략을 통해 색다른 생존법을 찾아가고 있다”며 “본격적인 시즌을 시작하기 전 1년간 함께 할 새 관객을 유입시키고 충성 관객을 확보하는 영리한 ‘락 인(lock-in) 전략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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