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 광풍에 쑥대밭…대만 상인들이 명맥 되살려 [서영수의 명산명차]

차마고도가 시작되는 이우고진(易武古鎭)은 황실 공차 1번지로도 유명하다. 1729년 청나라 옹정(雍正) 황제에게 보이차가 진상되면서 이우의 보이차는 황실 공차로 지정됐다. 이를 계기로 보이차 명가로 떠오른 이우는 청나라가 기울면서 쇠락을 거듭했다. 격동하는 근세사의 혼란 속에 이우를 비롯한 6대 차산의 보이차는 변방의 차로 전락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에 휘말린 보이차는 불태워졌고 차를 만드는 장인들은 숙청당했다. 전통 보이차의 흑역사 속에 이우의 명성도 묻혔다.
20세기 말 보이차를 찾는 훈풍이 불어오며 이우는 활기를 되찾게 됐다. 밀려오는 차상(茶商)과 넘치는 탐방객을 맞이하며 새로운 화양연화를 누리고 있는 이우를 찾아갔다.
엽기적 죽충 요리…이젠 없어서 못 먹어
인천국제공항에서 난징을 거쳐 중국 서남쪽 끝에 있는 윈난성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징훙의 가사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한 시각은 오전 9시였다. 가사공항은 동남아행 항공 노선의 허브 공항이다. 공항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이동했을 무렵 이우고진(義烏古鎭)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패방이 보였다. 타이족 발음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이우'는 '미녀 뱀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무박 2일 동안 공항에서 스낵과 기내식으로 때운 탓에 출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우에 거주하는 지인이 준비해 준 토속 음식으로 점심을 함께했다. 청정한 산속에서 채취한 귀한 나물과 야생 버섯 요리가 돋보이는 식탁 위에 방목으로 키운 닭과 돼지고기볶음이 어우러졌다. 이날의 엽기적 별미는 '죽충(竹蟲)'이었다. 대나무를 파먹고 사는 대나무벌레를 튀긴 요리는 새우깡처럼 고소하고 아삭한 식감을 제공했다. 예전엔 손도 대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식탁에서 안 보이면 서운한 별미가 됐다.
이우의 유일무이한 시네마 천국이었던 영화관 건물을 개조해 보이차 제조와 건조 창고로 활용하는 지인은 기계식 공정이 아닌 전통 수공 방식으로 보이차를 만드는 장인이다. 신축 건물과 신작로를 피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뒤안길로 들어섰다. 이우의 부활을 축하하듯 중국 장미가 차마고도를 밝히고 있었다.
이우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이우차문화박물관'을 지인의 안내로 둘러봤다. 박물관이라기에는 공간도 작고 전시물도 적은 사랑방 분위기의 장소였다. 예전에 있던 '이우차문화박물관'의 현판을 바꾸고 유물의 배치만 변화를 준 박물관은 10여 분이면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다.

청나라 황실 공차로 지정된 이우
박물관 자료에는 이우가 1728년부터 각광받게 된 내력이 간략하나마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우보다 먼저 차 산업으로 유명했던 만사 漫撒와 만라 曼腊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청나라 조정의 '개토귀류' 정책에 맞서 싸웠다. 토호 세력과 합세한 소수민족이 일으킨 민란으로 차 밭이 불바다로 변했다. 피와 불이 점철된 난리 통에 10만명에 달하던 차 산업 종사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만사와 만라는 졸지에 쑥대밭이 됐다. 스핑 石屛의 한족들이 명나라 때부터 대거 이주해 차를 만들어왔던 이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일찌감치 소수민족과 한족 문화가 다툼 없이 공존해 온 덕분이었다.
황실공차로 지정된 이우는 고 6대차산의 맹주가 되어 차마고도의 시발점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고 6대차산에서 생산된 보이 차가 이우로 모였다. 1851년 보이부 태수 정사오첸 鄭紹遷이 편찬한 '보이부지 普洱府志' 기록을 보면 "보이차는 금값의 두 배를 줘야 살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왕후장상이 아니면 마실 수 없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청나라 광서제 光緖帝가 변방에 불과한 이우의 관리에게 '서공천조 瑞貢天朝' 현판을 중국 공차 역사상 유일하게 하사했다. 이런 이우의 명성은 티베트까지 알려졌다. 마방 馬幇이 이끄는 말 위에 실린 보이차는 이우를 기점으로 차마고도를 따라 티베트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까지도 전해졌다.

이우의 보이차는 흔히 '이우정산 易武正山'으로 통용된다. 정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 아니다. 고 6대 차산을 비롯한 란창강 계곡에 접한 여러 산줄기에서 나오는 차를 두루 포함한다. 해발 656~2023m에 이르는 이우정산의 연평균 온도는 17.2℃로 일 년 내내 기후가 온난하다. 연평균 강우량은 1500~1900㎜로 비가 무시로 내리고 운무로 둘러싸여 있어 보이차 원산지 중에서도 최적의 차나무 생육 조건을 갖췄다.
차마고도 시발점 이우의 차마고도에는 청석판이 깔려 있다. 차가 다니는 요즘 도로로 치면 산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한 셈이다. 2~3m 폭으로 만든 청석판 차마고도 길이는 240㎞가 넘었다. 이 길 위로 청나라 말기까지 황실에 바치는 보이차가 이동했다. 크게 다섯 노선으로 나뉘는 차마고도 중 이우에서 베이징 자금성으로 가는 길을 '관마대도 官馬大道'라고 불렀다.

1920년대 생산 차 하나에 3억원 호가
관마대도를 통해 호급차가 유통됐다. 공차 제도가 사라진 1900년대 초부터 중화민국 시절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대부분 호號로 끝났다. 따라서 당시의 차를 속칭 호급차 號級茶로 부른다. 송빙호, 동경호 등 이우의 차장 茶莊에서 만든 차들을 골동급 骨董級 노차로 대우한다. 호급차 진품은 한 편에 수억 원을 호가한다. 수년 전 홍콩 경매장에 나온 송빙호와 생산 시기가 1920년대로 추정되는 양빙호는 2억7000만원과 3억원에 각각 낙찰됐다. 90년 이상 묵힌 보이차가 극히 드물게 세상에 나오기도 하지만 멸절 상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골동품 호급 차가 남아 있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 보이차가 녹차처럼 당해 연도에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해를 넘긴 보이차는 팔다 남은 처치 곤란한 재고일 뿐이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오랜 세월을 두고 숙성해 가며 마시는 차'라는 '월진월향(越陳越香)' 개념이 없었다. 호급차처럼 오래된 보이차가 남아나지 못하게 된 결정타는 1966년 5월 16일부터 10년에 걸쳐 벌어진 문화대혁명이었다. 전통문화를 일체 부인하며 공자마저 인정하지 않았던 홍위병이 보이차 장인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홍위병은 집 안과 창고에 남아 있던 보이차를 타파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해 모조리 불태웠다. 반달리즘이 횡행했다.

문화대혁명에 풍비박산 난 시진핑 일가
문화대혁명의 거친 파도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3세 철부지였던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가벼운 말실수를 빌미로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반혁명 분자'로 구금됐다. 실제 표적은 그의 아버지 시중쉰 習仲勳이었다. 중국공산당의 8대 원로로서 추앙받던 시중쉰은 주자파로 몰려 마오쩌둥 毛澤東에 의해 숙청 대상이 됐다. 풍비박산 난 시진핑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강제로 '이산가족'이 됐다. 시진핑은 산시성 山西省 옌안延安의 토굴로 하방 조치됐다.
시진핑은 토굴로 찾아온 촌민들과 배급제로 나오는 차를 나눠 마시며 삼국지와 베이징 이야기를 들려주며 호감을 샀다. 이들이 마신 차는 산시성에서 생산되는 복차 茯茶였다. 복차는 보이차와 같은 흑차 黑茶의 한 종류다. 시진핑은 옌안에서 힘겨운 토굴 생활을 버티면서도 공산당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공산주의청년단 가입 신청서를 여러 번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배급받은 차와 달걀을 아껴뒀다가 지역 책임자를 초대해 차와 달걀튀김을 접대하기도 했다. 21세가 된 시진핑은 1974년 1월 열한 번의 도전 끝에 마침내 공산당원이 됐다.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 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하며 시중쉰을 복권시켰다. 1980년 시중쉰이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 부위원장이 되면서 시진핑은 금수저 신분을 되찾아 당당하게 태자당에 입성하게 됐다. 천안문 무력 진압을 공개 반대한 시중쉰은 다시 한번 실각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세파(世波)를 이겨낼 만큼 장성해 있었다. 토굴 생활을 일찌감치 겪어본 청년 시진핑은 중앙이 아닌 군과 지역 정치에서 권력이 나온다는 것을 이미 체득한 상태였다.

150년 전 보이차가 온전한 형태로 남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도 이우는 여전히 엄동설한이었다. 황무지로 버려진 차산과 보이차 제조 기술을 가진 인력이 사라진 이우는 보이차 생산의 주도권을 가져간 란창강 건너편 신6대 차산이 부러울 뿐이었다. 이우의 명성을 부활시키는 행운의 봄바람은 뜻밖에도 대만에서 불어왔다. 1994년 전통 보이차를 찾아 대만 상인들이 이곳에 왔다. 그들을 도운 이우 향장은 호급차(號級茶) 제조 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숨죽여 살던 연로한 기술자를 안심시키고 설득해 정통 기법으로 보이차를 만들어냈다. 수십 년 전 이우의 차를 가져간 홍콩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보이차 주문이 쇄도했다.
차마고도와 보이차가 키워드로 떠오르며 보이차 조공 행렬을 재현한 관마대도 행사가 2006년 4월 2일 이우고진에서 출발했다. 1만 2000㎞를 말과 사람이 함께 걸어 베이징에 도착했다. 때맞춰 150여 년 전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바쳐진 보이차가 자금성 지하 창고에서 1960년대 발견됐던 사실이 새삼 부각됐다. 당시 다른 차들은 모두 삭아서 사라졌지만, 보이차만 유일하게 곰팡이나 부패 없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보이차는 신비한 차로 대륙에서 주목받았다. 황실 공차의 시발점이자 노차의 고향인 이우는 보이차 산업을 다시 꽃피우게 됐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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