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빙하의 땅 그린란드, 대서양 동맹의 살얼음판 되다

누크(그린란드)/원선우 특파원 2026. 1. 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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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맞서는 그린란드 사람들, 2026년 1월 22일 그린란드 / 원선우 특파원

지난 20일 인생에서 한번도 가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덴마크령 그린란드 땅을 밟아 6일간 현지를 취재했다. 세계 최대 섬이지만 인구는 5만6000여명 뿐인 이 동토(凍土)에 어제의 세계를 지탱해온 ‘대서양 동맹’이 균열을 일으키며 파열음을 내는 현장이 응축돼 있었다. 빙하처럼 단단하다고 여겨졌던 동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매입’ 야욕이 노골화된 이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 됐다. 이 격동의 현장을 전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취재진만 200여명에 달했다. 군사적 행동의 우려는 줄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23일 공개한 새 국가방위전략(NDS)에서 그린란드를 미국의 영향권을 의미하는 ‘서반구’의 한 부분으로 규정하며 ‘미국 일방주의’를 멈추지 않을 것을 거듭 예고했다.

엿새 동안 만난 현지인 수십 명은 세계 초강대국이 동맹국 영토를 무력으로 합병하겠다는 전대미문의 위협, 벌 떼처럼 몰려든 취재진의 극성 취재에도 삶의 현장을 지키면서 품위 있고 절제된 언어로 분노를 표출했다. 옌스 프레데리크 닐센 그린란드 자치정부 총리는 “그린란드의 자주권은 ‘레드라인’”이라며 “매일 밤 ‘사가겠다’ ‘빼앗겠다’고 위협한다면, 존중에 기반하는 파트너 간 대화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관공서에서 일하는 말리크(27)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에 편입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는 도발적 질문에도 버럭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서 잘 살아왔다. 왜 우리가 미국의 일부가 돼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점잖게 응수했다.

원선우 특파원그린란드 주민들로 꽉 찬 덴마크 군함 24일 그린란드 누크항에 정박한 덴마크 해군 호위함 HDMS 베데렌호 격납고에서 주민들이 전투 장비와 피복 등을 관람하고 있다. 덴마크 해군은 이날 주민들과 취재진에 조타실과 갑판, 격납고 등 함정 주요시설을 개방했다.

덴마크는 1949년 출범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로 미국의 오랜 동맹국이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 미국과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불과 100여일 만에 공군기지를 건설한다. 당시 한반도에서 소련·중국의 위력을 절감한 미국이 모스크바를 최단 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전략 폭격기 기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소 냉전 대치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지 건설로 고향을 떠난 원주민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미군 기지는 이누이트 말 ‘피투피크’(개를 묶어두는 곳이란 뜻)라고 명명했다.

제2차 대전 이후 대서양 동맹, 서방 진영을 지탱해온 가치는 인류 보편의 자유였다. 히틀러의 나치, 마오쩌둥의 중공, 스탈린의 소련, 호메이니의 이란, 푸틴의 러시아, 그리고 김정은의 북한과 맞서는 정당성은 모두 이 가치에서 나온다. 트럼프는 “미국은 그동안 ‘국제질서’ 같은 추상적 개념을 지키겠다며 우리 국민의 생명, 신뢰, 자원을 탕진해왔다”고 하지만, 강자의 압제에 대항하는 것은 기독교에 기반한 미국 건국 정신 그 자체였다.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있는 ‘자유의 종’(1752)에는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레위기 25장 10절)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자유 질서 원칙에 입각한 ‘신뢰’가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된 본바탕이다. 제 손으로 이 신뢰를 허무는 미국에 대해 그린란드 사람들이 느끼는 ‘황당함’과 ‘안타까움’을 지난 6일간 목격했다. 그린란드가 지정학적으로 중국·러시아 견제에 중요하다는 사실은 70여년전 6·25 전쟁 당시 고향을 미국의 군사 기지로 내준 이누이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덴마크와 맺은 각종 협정으로 이미 그린란드에서 자유로운 군사·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기존 질서와 협력을 무시하고 갈등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80년간 유지되던 국제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판이 짜여지는 지금의 지각 변동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예측이 어렵다. 국제정치 흐름을 읽지 못하고 100여년전 나라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던 한국은 지금 벌어지는 국제정치의 대격변을 그 어느 나라보다 민감하게 응시하고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린란드에서 취재한 국제 이슈가 결코 먼나라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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