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그들이 결국 죽는다는 희망

임소연 동아대 융합대학 교수 2026. 1. 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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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잔잔한 희망이 솟아나는 논문을 발견했다.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남긴 말로 시작하는 논문이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자들은 결국 죽고 그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란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75년부터 2003년 사이 미국 생명과학 분야에서 스타 과학자의 조기 사망은 오히려 그 분야의 새로운 발전을 촉진했다. 존재감이 크고 큰 업적을 이룬 스타 과학자일수록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외부 연구자들은 그 분야에 대한 도전을 회피했다.

반면 ‘거인’ 과학자가 사망한 이후에는 그동안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연구자들이 유입되어 새로운 문헌과 개념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영향력이 높은 논문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과학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그의 부재로 새로운 인재가 유입될 때 발전한다니 과학의 혁신뿐만 아니라 다양성과 포용성에도 큰 함의를 주는 연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과학은 한 장례식에 한 번씩 진보하는가?” 논문의 제목이기도 한 강렬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이 논문을 읽으며 최근 접한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떠올랐다. 일론 머스크의 인공지능(AI) 챗봇인 ‘그록(Grok)’이 올해 초 9일 만에 무려 440만장 이상의 이미지를 게시했고 그중 최소 41%인 180만건에는 여성에 대한 성적 이미지가 포함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가 폭증한 것은 작년 말 일론 머스크가 SNS 엑스(X)의 그록 공개 계정을 통해 비키니를 입은 자신의 사진 이미지를 올리면서부터이다. 비키니를 입은 여성의 사진을 일론 머스크로 바꾸라는 요청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이후 수많은 X 사용자들이 그록에 몰려들어 여성과 어린이를 성적 대상화하는 이미지를 생성하고 게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론 머스크의 비전을 굳게 믿고 환호를 보내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테슬라는 종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국내 이공계 대학들은 앞다투어 ‘한국판 일론 머스크’ 양성계획을 발표해왔다. 그를 포함한 테크업계의 대스타들 그리고 그들을 믿는 이들을 설득할 방법이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막스 플랑크가 옳다면, 그들이 세상에 없을 즈음 다른 비전의 기술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게 할 수는 있다.

마침 한 여성 과학자에게서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얼마 전 페미니스트 과학기술을 주제로 온라인 강의를 했을 때 공정성이나 책임보다는 국가 경쟁이 우선인 인공지능 분야의 젊은 연구자로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고민을 나눠주신 분이었다. 그 무력감에 백분 공감하면서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함께 버티고 살아남아 바꿔 나가자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 말을 잊지 않는 연구자가 되겠다는 e메일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희망의 증거가 있을까. 답장에 쓰지는 못했지만 한번 더 그분에게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들은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자랍니다!

임소연 동아대 융합대학 교수

임소연 동아대 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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