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시, 시의 세계]회계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2026. 1. 25. 20:02

먼저 눈앞에 황야가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상상해보라
다음으로 발아래에서 지평선까지 직선을 하나 그려라
자, 이것이 세계 전체와 그것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세계 속 모든 요소는
이 분수령을 중심으로 완전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좌와 우, 이것이 기본이다
자, 왼쪽에는 네가 가진 것들
오른쪽에는 그것을 얻으면서 발생한 채무를 배치한다
말하자면 쾌락과 생식, 미와 독
현재의 삶과 언젠가 찾아올 죽음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와 잃어버린 기억
절대로 혼돈이라는 개념을 들여선 안 된다
세계는 지금 질서를 획득하고 있으니
이 시스템에 맞지 않는 것은 지평선 너머로 추방하라
설령 그게 네 자신일지라도 - 요쓰모토 야스히로(1959~)
이 시는 요쓰모토 야스히로의 첫 시집 <웃는 버그>(1991)에 실려 있다. 시인은 글로벌 자본주의가 얼마나 많은 오류(bug)를 내포한 시스템인지를 풍자한다. 금융위기, 플랫폼 장애, 프로그램 오류는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회계적 사고는 세계의 질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한다고 믿는다. 버그의 웃음은 그 간극에서 발생한다. ‘회계’라는 시도 모든 것을 수입과 지출, 자산과 채무로 환산하는 회계적 사고를 교란한다. 발아래 그은 직선 하나를 분수령 삼아 좌우에 배치한 항목들이 흥미롭다. ‘시’라는 장부에는 숫자 대신 “쾌락과 생식, 미와 독/ 현재의 삶과 언젠가 찾아올 죽음/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와 잃어버린 기억”이 기입되어 있다. 시인은 이런 방식으로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킨다. 회계적 사고는 오늘도 우리에게 명령한다. “절대로 혼돈이라는 개념을 들여선 안 된다”고. “이 시스템에 맞지 않는 것은 지평선 너머로 추방하라”고. 무심코 시를 읽다가 “설령 그게 네 자신일지라도”에 이르러 섬뜩해진다. 나 자신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버그처럼 느껴져서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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