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말의 해, ‘말달리자’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2026년 붉은 말의 해가 밝았다.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새해다. 2026년 새해 첫 공연은 보신각 타종 행사로 시작했다. 33번의 보신각 종이 울리고, 크라잉넛은 새해 첫 곡으로 ‘말달리자’를 노래했다.
매서운 날씨 속에서 손은 꽁꽁 얼어붙었고, 금속으로 된 베이스 줄을 연주할 때면 손이 베이는 듯했다. 그래도 수많은 인파가 새해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염원하러 모였다고 하니, 여기서 기세가 꺾일 수는 없었다.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뜨거운 입김으로 손을 녹여 가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허설을 마치고 코앞에서 보신각종 타종을 지켜봤다. 33번의 종소리가 나의 몸과 마음을 공명시키며 차분히 정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타종이 끝나고 우리는 무대로 향해 새해 힘찬 붉은 말의 말발굽 소리처럼 드럼 비트에 맞춰 ‘말달리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타종 행사를 보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린 관객들은 모두 리듬을 타며 뛰기 시작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가 연주하고 노래할 때 그 사이를 휘감는 공기는 모두를 연결해 주는 느낌이었다. 같은 리듬을 타고, 같은 감정을 느끼며, 같이 노래한다. 그 순간 어떤 치유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우리와 관객들은 추위 따위는 잊어버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 새해 웃는 일,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며 ‘좋지 아니한가’를 연주했고, 2026년 첫날 ‘밤이 깊었네’를 연주했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의 환한 미소와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앙코르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 조명을 비췄고, 아름다운 별빛이 내려앉은 것 같은 장관이 펼쳐졌다. “생각해 보면 영화 같았지. 관객도 없고 극장도 없는 언제나 우리들은 영화였지.” ‘명동콜링’의 가사처럼, 정말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어쩌면 삶은 한편의 롱테이크 영화 같다. 리허설도 없고, 관객도 없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관객이자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삶은 매일 고단한 역경과 뒤통수를 치는 사건 사고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내 예상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관객들이 보여준 휴대폰 불빛처럼 그것들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곤 한다. 하늘이 우리에게 “컷”이라고 사인을 보내기 전까지, 우리는 삶을 멋지게 연기해야 한다. 인생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배우일 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제작, 스태프, 때로는 스턴트까지 직접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로맨틱 코미디, 때론 비련의 주인공, 재난, 다큐, 액션까지 우리의 삶은 영화 그 자체다.
작년엔 크라잉넛 30돌을 맞아 신곡도 내고, 여러 페스티벌에 참여했으며, 홍대 상상마당에서 전시도 열었다. 전시는 올해 1월31일까지 이어진다. 30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말달려 온 세월을 돌아볼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 석달간 많은 선후배들과 릴레이 콘서트도 열었다. 김창완밴드, 김수철, 잔나비, 장기하, 십센치(10CM), 와이비(YB), 국카스텐 등과 공연을 이어갔다. 함께해주고 도와준 모든 분들, 소중한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순간들이었다.
솔직히 예전에는 무대에서 선배님들이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니, 대부분 처음 보는 관객들일 텐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밴드 생활을 하며 벚꽃을 서른번쯤 맞아보니,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귀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연장에 와준다는 것, 우리 무대에 공감하며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는 마법 같은 시간들, 삶의 지친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노래가 위안이 되고 웃음이 될 수 있다는 것. 잊히지 않고 우리가 무대에서 존재할 수 있게 박수를 쳐주신 관객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꼭 화려한 무대가 아니어도, 자그마한 라이브 클럽에서 관객이 한두명뿐이어도, 그 순간은 모두 소중하다. 무대가 크든 작든, 음악을 하는 순간 관객과 우리는 반짝이며 빛나는 별이라는 것을.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누군가 바라봐주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별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빛나고 있는 별이다. 희미하게 빛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살아 있었다고, 꿈일지는 몰라도 우리는 분명 존재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크라잉넛에게 새로운 30년이 펼쳐졌다. 병오년, 붉은 말의 해.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노래로 다시 한번 뜨겁게 말달리고 싶다. 중간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자. 작심삼일을 122번 하면 366일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1월이 가기 전에 힘찬 말발굽 소리를 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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