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1930-1940년대 600여곡 지은 일제강점기 최고 작사가
4)가요사의 큰 인물 아산 출신 조명암
시인·작사가·극작가·연출가 등 다재다능
해방후 월북 고위직 지내… 1988년 해금

2009년 9월 대한민국 법원은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다. 월북한 작사가 조명암(조영출)의 저작권이 남한에 사는 딸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로 딸 조혜령은 <고향초>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선창> 등 4곡의 권리를 되찾았다. 1948년 조명암이 월북한 이후 수많은 곡들이 주인이 바뀐 채 불려져왔다.

조혜령이 부친의 노래를 되찾은 것은 쉽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실 입증이 어려운 데다 일부 작사가와 그 유족들이 저작권 양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딸 조혜령과 사위 주경환
부부가 평생 자료를 모았고, 학계와 가요계 연구자들이 '조명암 작사'라고 찍힌 일제강점기 음반을 찾아내 도움을 줬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예명인 조명암과 본명 조영출, 김다인 이가실 금운탄 등으로 등록된 작품이 600여 곡에 이른다. 추후 연구 과정에서 더 많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1988년 8월 월북·좌익작가 해금 조치로 이기영 임화 백태원 한설야 등의 작품에 대한 출판 연구 교육이 허용됐다. 해금 문인이나 음악가들의 작품이 많아야 수십편인데 비해 작사가인 조명암의 작품은 수백 편이나 됐다.

그가 지은 명작은 <목포는 항구다> <고향설> <낙화유수> <울며 헤진 부산항> <추억의 소야곡>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를 빼면 1930-40년대 가요사를 기술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이다. 작품의 양도 많았거니와 작품의 질적 수준도 빼어나다.

조명암은 1913년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467번지에서 태어났다. 생가터는 영인면 소재지 아산리의 여민루<관아의 출입문> 및 장터와 아주 가까운 곳이다. 조명암의 본래 이름은 조영출로 동네 남쪽에 위치한 해발 363m 영인산 자락에서 출생했다는 뜻이다.
어렸을 때 매우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서울로 이사했고, 1921년 아버지가 작고한 뒤 1922년 어머니와 함께 함경도 안변의 석왕사에 들어갔고, 여기서 석왕사 보통학교를 다녔다.
조명암은 15세 때인 1928년 금강산 건봉사로 출가하여 중련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여기서 의병장의 후손 박설산 조영암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건봉사 부설 봉명학교의 청년회 독서회에서 문학을 배우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토론도 했다.
건봉사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만해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줬으며, 봉명학교에 다니는 조명암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신학문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만해의 주선으로 서울로 올라간 조명암은 불교계 학교인 보성고보로 진학, 1930년부터 1934년까지 5년 과정을 마쳤다. 학적부에 보증인이 함경남도 안변 출신 고치조라고 나와 있는데 직업은 경성의 소림사 승려로 적혀있다. 조명암이 함경도 석왕사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부설 고교 과정 제2고등학원을 거쳐 1938년 불문과에 입학, 1941년에 졸업했다. 일본 유학 중에도 방학 때면 건봉사로 돌아와 포교를 위한 연극이나 가장행렬을 지도하고 후배들에게 문학을 가르쳤다. 고교와 대학의 학비는 건봉사에서 지원해줬다.


조명암은 고교와 대학 재학시절 시인과 작사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1932년에 시 <밤>을 조선일보, <이 동굴 안을 거니는 자여>를 신동아에 발표했으며, 34년에는 <동방이 태앙을 쏘라>가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같은 해 동아일보에 조명암이라는 필명으로 가요시 <서울 노래>를, 별곤건의 유행소곡 현상공모에 <청춘곡>이 입선하는 등 고교시절에 이미 문인으로 자리잡았다.

조명암은 뛰어난 모더니즘 시인이기도 했지만 대중가요의 가사를 짓는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봉명학교 교사를 하면서 <알뜰한 당신> 등을 발표했는데 이때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의 권유를 받아 대중가요 작사가로 나서게 된다. 안목이 탁월했던 공주 출신 이철은 시인이자 일본 유학파였던 10살 아래 조명암을 눈여겨봤다. 작사가로서의 실력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오케레코드로 끌어들인 것이다. 조명암은 보성고보 시절 <인도의 달밤>(<신라의 달밤>의 전신) <낙화유수> <진주라 천리길> <서귀포 칠십리> <울며 헤진 부산항> <코스모스 탄식> <화류춘몽> <꼬집힌 풋사랑>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뒤로도 <꿈꾸는 백마강> <선창> <고향초>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고교시절부터 1941년 대학을 졸업한 뒤 1944-45년까지 대부분의 작품을 썼고, 수작들도 이 무렵에 집중돼 있다.
조명암과 오케레코드의 인연도 빼놓을 수없다. 오케레코드가 내놓은 이봉룡 작곡 이난영 노래의 <목포는 항구다>,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 <낙화유수>, 손목인 작곡 김정구 노래 <바다의 교향시>,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의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의 가사를 쓴 사람이 이철 사단의 일원인 조명암이다.


조명암 스스로 대표작으로 여기는 <선창>이 탄생한 이야기도 전한다. 충남 예산 출신 고운봉은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돈 30원을 들고 무작경 상경했다. 고운봉은 태평레코드로 찾아가 작곡가 이재호, 작사가인 박영호의 앞에서 노래를 불러 가수가 됐다. 태평레코드에서 <남강의 추억>으로 데뷔했던 고운봉은 회사를 옮겨 1941년 조명암이 작사하고 천재음악가 김해송이 작곡한 <선창>으로 대박을 터뜨린다. 조명암의 고향 아산과 고운봉의 고향 예산이 가까워 평소에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조명암은 가요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작품 수도 600여 편에 이르고 질적인 면에서도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성공을 이뤄냈다. 일제강점기 64편의 시를 쓴 시인이자 대중가요 작사가, 희곡작가, 연출가로 활동하는 등 다재다능한 르네상스인의 면모를 보여줬다. 학계에서는 그가 지은 노랫말이 일제하 조선인들의 잔잔한 애상과 생활정서를 잘 담아냈다고 평한다. 조명암에 이르러 노랫말이 민요나 번안가요, 창가의 틀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현대적 정서를 담아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으로서 언어를 다루는 솜씨까지 더해져 시대를 대표하는 세련된 노랫말을 다수 생산했던 것이다.
조명암의 지은 노랫말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에 오르내린다.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누구나 서너곡 쯤 그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명암에 대한 평가는 박절하다. 그는 일제 말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가사와 악극, 연극대본을 지었다. 해방 후에는 1948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차관)을 지냈다. 조명암이 월북한 뒤 남한에 남겨진 딸 조혜령은 먹고살기 힘들어 한동안 불가에 의탁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조명암은 고향인 아산에서 더 홀대를 받고 있다. 지역사회 일각에서 조명암을 기리는 가요제를 추진했으나 첫회만 열리고 중단됐다. 친일과 월북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충남 예산 덕산에 가요 <선창>을 새긴 고운봉 노래비,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가사 <고향초>와 시 <칡넝쿨>을 담은 비석이 있으며, 목포 유달산에는 <목포는 항구다>, 제주도에도 <서귀포 칠십리>를 담은 노래비가 세워진 것과 크게 대비된다. 친일과 반공에 관한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예리한 면돗날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양단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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