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한 소고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이후, K-반도체, K-컬처, K-뷰티, K-푸드처럼 각종 상품과 산업에 ‘K’를 붙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역사적으로 한국이 이처럼 국제적 주목을 받은 시기가 또 있었을까. 그중에서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의의 중심에 있는 분야가 바로 K-반도체다.
2011년 독일 메르켈 총리가 제조 AI와 스마트 제조를 핵심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비전을 공식적으로 제시했고, 2016년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제4차 산업혁명이 공식 의제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 역시 산업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에 직면해 왔다.
이 과정에서 광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다른 지역들이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을 주요 의제로 내세울 때 AI 선도 도시를 선언하고 AI 데이터센터를 유치하는 등 선제적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지 못하면서, 글로벌 경쟁에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현 정부 들어 ‘세계 AI 3강’을 목표로 정책 기조가 전환되면서, AI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가 다시 확대되고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변화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동시에 기존 선진국들과의 경쟁과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개발도상국들의 도전을 함께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석유화학산업의 경험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의 석유화학산업은 출발 당시 기술도, 원료도 부족해 턴키 방식으로 공장을 도입해야 했지만, 이후 고도성장을 이끄는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저가 공세와 산유국의 직접 진출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직면했고, 현재는 성숙기를 지나 쇠퇴 국면에 들어서며 구조조정과 산업 축소의 부담을 안고 있다.
이와 달리 AI 산업 시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그동안 제조 강국으로 축적해 온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새로운 성장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산업을 일궈낸 기업들의 노력은 물론, 이를 뒷받침해 온 정책 결정과 정치적 리더십 역시 정당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성과에 안주할 시기가 아니라, 향후 수십 년의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할 분기점이다. 용인에 조성될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 공장과 대규모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기 때문에 입지 선정에서 전력 공급 능력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다. 현재의 전력망 구조를 고려할 때,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용인으로 안정적으로 대량 송전하는 데에는 상당한 제약이 존재한다.
용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수도권 인근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에는 전력 공급 여력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반도체 산업의 지역 분산 배치는 보다 합리적인 대안이며, 반도체를 국가 안보 자산으로 인식할 경우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첨단 산업을 재생에너지로 뒷받침하더라도 전력의 안정성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이로 인해 새로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반면 전남 지역은 이미 재생에너지 생산량이 수요를 상회하고 있으며, 기존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병행할 경우 반도체 클러스터를 충분히 가동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느 쪽이든 찬반을 떠나,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도체 클러스터 논의는 단순한 지역 유치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완화하고, 국가 발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과 직결된다. 국가의 미래를 전적으로 기업의 판단에만 맡길 수는 없다. 국가는 기업 활동의 기반이며, 국가가 튼튼해야 산업과 사회의 지속성도 보장된다.
마침 오랫동안 논의만 이어져 온 광주와 전남의 행정 통합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행정 통합만으로 지역 소멸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결국 핵심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다. AI 시대의 중심에 있는 로봇, 자율주행차, 드론 등을 축으로 한 피지컬 AI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반도체 클러스터의 분산 배치를 전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기업을 유치하고자 하는 지자체는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제조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수도권으로 가지 않더라도 양질의 교육과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된다면, 삶의 만족도가 높은 고향을 떠날 이유는 줄어들 것이다. 교육·의료·주거·문화 등 정주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기업과 인재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지역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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