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세계이자 국제질서다

정인환 기자 2026. 1. 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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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 1인칭 주어로 채운 ‘평화위 헌장’… 적대국도 동맹국도 ‘괴랄한’ 시간 속으로
2026년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9월2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20개 항목으로 이뤄진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평화구상을 발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같은 해 11월17일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구상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결의 2803호를 채택했다. 평화구상에 국제법적 지위를 부여해준 셈이다.

4쪽 분량의 결의에는 이른바 ‘평화위원회’(BoP·평화위)란 명칭이 모두 15차례 등장한다. 결의 2항은 평화위를 ‘과도 행정기구’로 규정했다. 결의는 평화위가 관련 국제법과 절차에 따라 가자지구 재건·복구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가자지구를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가자지구의 ‘과도정부’ 구실을 하도록 했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개혁이 충실히 이뤄지고 가자지구의 재건·복구가 진척되면 최종적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했다.

각국에 10억달러짜리 초청장 발송한 미국

“평화위 헌장에 가자지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이스라엘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2026년 1월18일 이렇게 보도했다. 신문은 미국이 각국 정부에 평화위 가입 초청장을 보내며 첨부한 평화위 헌장을 단독 입수해 공개했다. 총 13개조로 이뤄진 헌장은 전문에서 이렇게 밝혀 적었다.

“항구적 평화를 위해선 실용적 판단과 상식적 해법, 실패한 과거의 접근법과 제도에서 탈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부담과 책임의 공유에 기반한 지속적이고 결과 중심적인 협력관계만이 장기간 위태로웠던 지역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더 발 빠르고 효과적인 국제적 평화구축 기구가 필요하다. 실질적인 협력과 효과적인 행동을 다짐하는 국가의 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한다.”

2026년 1월17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거리에서 한 남성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의 석방을 촉구하는 벽화 옆을 지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평화위는 더 이상 유엔 안보리가 결의에서 밝힌 ‘가자지구 과도 행정기구’가 아니다. 세계 도처의 갈등과 분쟁을 조정 해결하는 유엔 헌장이 안보리에 부여한 역할을 평화위가 떠맡겠다고 나선 게다. 평화위 헌장 구석구석에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드러나 있다. 헌장 제3조 2항은 “도널드 트럼프가 창립위원장을 맡는다”고 규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창립위원장 자격으로 유일하게 거부권을 갖는다. 또 평화위의 △의제 설정권 △회원국 초청권 △산하 위원회 해산권 △후임자 지명권도 행사한다. 회원국이 되려면 회비 10억달러를 현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1월21일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운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는 의도”라고 전했다. 신문은 마크 웰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국제법)의 말을 따 “평화위는 유엔에 대한 직접 공격이자, 특정인이 자기 멋대로 세계질서를 뒤엎으려는 시도”라고 짚었다.

베네수엘라에서의 기이한 ‘신탁통치’

2026년은 출발부터 그랬다. 1월3일 미군 특수부대가 주권국가인 베네수엘라 영토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는 1월5일 ‘마약 테러’ 등의 혐의로 미국 뉴욕의 법정에 출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6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최대 5천만 배럴(약 28억달러 상당)의 원유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며 “시장가로 매각해 얻은 자금을 양국 국민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그는 1월9일엔 베네수엘라 원유 판매 수익을 미 재무부 계좌에 넣어 관리하고, 타국과 기업의 채권 청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행정명령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 ‘맘대로’였다.

2026년 1월21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최근 시위 사태로 불에 그을린 이슬람 사원(모스크) 벽면에 가림용 대형 국기가 내걸려 있다. EPA 연합뉴스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베네수엘라 정부는 1월20일 미국이 판매한 자국산 원유 대금 5억달러 가운데 1차 분할금으로 3억달러를 지급받았다.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대통령은 방송 연설에서 “확보한 3억달러는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낮추고, 물가 인상과 소비자 구매력 저하를 유발하는 외환시장의 불안전성을 해소하는 데 쓰겠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의 공식 고정환율은 달러당 347볼리바르지만, 암시장 환율은 변동폭이 크다. 마두로 대통령 부부 납치 직후 달러당 900볼리바르 선까지 치솟았던 환율은 현재 500볼리바르 선까지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판매한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규모는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2025년 12월 초부터 미국이 해상을 봉쇄하면서 베네수엘라는 생산된 원유 전량을 저장시설과 정박 중인 유조선에 보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최대 5천만 배럴’의 실체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은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시장 평균가보다 할인해서 판매했다”고 전했다. 미군 남부사령부는 1월20일 “베네수엘라와 연계된 유조선 ‘사기타호’를 카리브해에서 추가 나포했다”고 밝혔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해상봉쇄에 나선 이후 7번째 나포다. 나포한 유조선의 원유도 미국이 원하는 가격과 방식으로 판매될 터다. 기이한 ‘신탁통치’다.

이란 사망자 최소 5천 명… “미국이 기꺼워할 것”

위기의 정점으로 치닫던 이란 상황은 일단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월14일 이란의 영공 폐쇄와 카타르 주둔 미군의 일부 철수 등이 맞물려 불안감을 키웠지만,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들과 만나 “이란에서 살육이 중단됐다고 들었다”고 발언한 뒤 긴장감이 한풀 꺾였다. 현지 상황은 어떨까?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란의 주요 도시는 사실상 ‘계엄’ 상태다. 도심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에는 중무장한 혁명수비대 병력이 배치됐고, 바시즈민병대가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극한 폭력을 경험한 시민들도 더는 거리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양새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란 인권활동가 집단이 펴내는 ‘인권활동가통신’(HRANA)은 시위 발발 25일째를 맞은 1월21일 집계한 자료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4902명, 확인 중인 사망자는 9387명에 이른다. 7389명이 중상을 입었고, 2만6541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앞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13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란의 애국자들이여, 시위를 지속하라. 정부기관을 장악하라. 곧 도움의 손길이 당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요아브 갈란트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군방송에 출연해 “이란 정권은 무너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할 때 언제든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한 상태로 전략적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다. 가장 중요한 건 이란 현지의 시위다. 우리는 배후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상황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동 전문매체 미들이스트아이는 이날 테헤란 시민 레자(28)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이란이슬람공화국 정부는 개혁할 능력은 없고 할 줄 아는 건 탄압뿐이다. 그 대척점에 전쟁범죄자인 도널드 트럼프와 베냐민 네타냐후가 있다. 그들이 민주적인 이란을 원할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들은 그저 약해진 이란을 원할 뿐이다. 불행히도 이란이슬람공화국 정부가 정확히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다. 이란이슬람공화국 정부는 이란을 파괴하고 있고, 이를 가장 기꺼워하는 건 미국과 이스라엘일 것이다.”

2026년 1월18일 덴마크 병사들이 자국 자치령인 그린란드에서 중무장한 채 경계훈련을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그린란드 향해 계속되는 ‘폭력적 구애’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폭력적 구애’도 계속된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자 노르웨이·스웨덴·프랑스 등 8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 잇따라 그린란드로 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1월17일 “8개 파병국에 2월1일부터 10%, 6월1일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은 1월21일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과 매우 생산적인 회담을 했다. 그린란드, 나아가 북극 전반과 관련한 협상의 틀을 마련했다. 2월1일 발효 예정이던 관세는 부과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나흘 전과 살짝 다른 태도를 보였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 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협상의 틀’에 그린란드 광물 채굴권과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방어 체계인 ‘골든돔’ 구축 관련 내용이 담겼다고 전했다. 원하는 건 뭐든 뺏는다. ‘동맹’도 예외 없다. 트럼프식 국제질서다.

“오늘 이 자리에서 국제질서의 파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좋았던 옛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강대국이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지정학의 ‘잔혹한 현실’이 시작되고 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1월20일 스위스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2기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라”는 ‘애정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고통을 견딘다”는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경구를 언급한 카니 총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캐나다 같은 나라는 오랜 기간 이른바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 아래서 번영을 구가했다.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원칙을 찬양하고, 그 예측 가능성의 혜택을 봤다.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부분적으로 거짓이란 점도 알고 있었다. 강대국들은 원하면 언제든 규칙의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무역 규칙은 비대칭으로 적용됐다. 국제법도 피고 또는 피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리 적용됐다.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허구였지만, 유용했다. 특히 미국의 패권은 국제사회에 공공재를 제공했다. 바닷길을 열고, 금융체제를 안정화하고, 집단안보를 제공하고, 분쟁 해결의 틀을 제시했다. 그래서 우리도 주장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굳이 지적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더는 먹혀들지 않게 됐다.”

카니 캐나다 총리 “그리움은 전략이 될 수 없다”

카니 총리는 현재 세계가 “단순한 전환기가 아니라 ‘파열’의 한복판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대국들이 경제적 통합을 무기화하기 시작했다. 관세는 지렛대가, 금융체제는 강압의 수단이, 공급망은 약탈을 강제당할 약점이 됐다. 통합이 예속의 원인이 될 때, 통합을 통한 상호 이익이란 ‘거짓 속의 삶’은 지속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옛 질서를 되돌릴 순 없다. 애도할 필요도 없다. 그리움은 전략이 될 수 없다”며 “더 이상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국내적으로 힘을 기르고, 필요할 때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옛 질서는 죽었다. 새 질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적 징후’만 도처에 가득하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지나고 있나? 세계가 ‘미국 없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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