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조 실적에도···이재용 “숫자에 속지 마라”

길해성 기자 2026. 1. 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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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주도권 경쟁 속 기술 격차 확대 주문
사상 최대 실적 전망에도 내부 긴장감 유지
29일 삼성·SK 실적 콜, AI 반도체 전략 공개

[시사저널e=길해성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조직 내부에 '현재에 안주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독보적 기술력 확보'를 강하게 주문했다. 사상 최대 실적 달성이 전망되는 상황에서도 구조적 위험 요인이 여전하다는 판단 아래 리스크 관리와 기술 격차 확대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9년 만의 임원 교육, '안주 경계' 메시지 담아

25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최근 전 계열사 부사장 이하 임원 2000여명을 대상으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인력개발원이 주관하는 이번 세미나는 2016년 이후 9년 만에 재개된 전사적 임원 교육이다. 조직 기강을 다잡고 리더십 역할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세미나에서는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긴 영상도 상영됐다. 선대회장의 주요 발언과 함께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올해 경영 전략 방향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서는 이 영상이 사실상 이 회장의 신년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 사진=연합뉴스

이번 교육에서 공유된 이 회장의 메시지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단기 실적에 안주하지 말 것 ▲지금이 기술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AI 중심 경영과 인재 확보를 통한 기업 문화 혁신이다. 이 회장은 "숫자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라며 실적 반등이 지닌 착시 효과를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

참석자들에게 수여된 크리스털 패의 문구 역시 지난해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에서 올해 '위기를 넘어 재도약으로'로 변경됐다. 이는 위기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력과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경영진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샌드위치 위기론' 재소환···미·중 사이 전략적 딜레마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건희 선대회장이 2007년 언급했던 '샌드위치 위기론'도 다시 언급됐다. 당시에는 중국의 가격 경쟁력과 일본의 기술력 사이에 낀 한국 경제를 지칭한 표현이었다. 지금은 미·중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인공지능(AI) 중심 산업 구조 전환이라는 더 복합적인 구도가 겹쳐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상황이 과거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가파른 추격과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속에서 삼성전자가 전략적 선택과 비용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제조 효율화를 넘어 독보적인 원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담긴 발언으로 풀이된다.

◇사상 최대 실적 전망···HBM이 수익 구조 재편

이러한 긴장감과 대조적으로 실적 지표는 반등을 넘어 호황 국면에 들어섰다. 삼성전자는 이달 8일 잠정 실적에서 지난해 4분기 매출 93조원, 영업이익 20조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치다.

실적을 견인한 축은 반도체다.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LSI를 아우르는 반도체 사업의 핵심 조직이다. 삼성의 기술 경쟁력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상을 가늠하는 지표로 통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기흥캠퍼스 내 첨단 복합 반도체 연구개발(R&D) 센터인 NRD-K 클린룸 시설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메모리 호황의 성격도 과거와 달라졌다. 예전에는 PC와 스마트폰용 범용 D램이 가격 사이클을 이끌었다. 지금은 AI 서버가 수요의 중심이 됐다. 이 과정에서 AI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일반 메모리보다 높은 수익을 내며 반도체 사업의 수익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여기에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와 모바일 저장장치(UFS) 등 고성능 낸드 제품까지 가격 반등에 가세하며 실적의 질도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다.

증권업계는 올해 삼성전자 DS 부문의 연간 영업이익이 최대 16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종전 최고 기록인 2018년 44조원대를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전망치가 현실화될 경우 삼성 반도체 사업은 사상 최대 실적을 다시 쓰게 된다.

◇SK하이닉스와 격차 좁히기···승부처는 29일

이 같은 호황 국면 속에서도 이 회장이 경고 메시지를 던진 배경에는 HBM을 둘러싼 경쟁 구도가 자리하고 있다. HBM은 단순한 메모리 제품이 아니라 글로벌 빅테크와의 장기 공급 계약과 공정 기술, 패키징 역량 등을 갖춰야 경쟁력을 인정받는다.

현재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3E 공급 확대와 차세대 HBM4 준비를 통해 격차를 좁히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실적이 좋아진다고 기술 주도권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다. 수율 안정과 고객사 인증, 양산 일정이 맞물려야 비로소 시장 지위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내부 긴장감은 여전하다.

업계의 시선은 오는 29일로 쏠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같은 날 1시간 차로 4분기 실적 콘퍼런스 콜을 연다. HBM 양산 일정과 주요 고객사 대응 전략, 차세대 제품 로드맵 등이 공개될 가능성이 크다. 기술 주도권을 둘러싼 양사의 신경전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자리라는 평가다.

이 회장의 '마지막 기회' 발언은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호황기에 기술 격차를 벌리지 못하면 다음 사이클에서 다시 뒤처질 수 있다는 경고다. 삼성전자가 이날 내놓을 HBM 전략과 투자 방향은 단기 실적을 넘어 향후 반도체 주도권 경쟁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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