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에 이어 반도체 겨눴다…한국 향한 ‘특허 괴물’의 공습
자국 우선주의 앞세운 트럼프 2기부터 방어 수단도 약화
(시사저널=조유빈 기자)
세계 시장을 선도하며 경쟁력을 보여주던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에 하나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글로벌 점유율을 높이고 기술 우위를 굳히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제기된 '특허 소송'이다. 이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과 비용은 산업의 불확실성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비슷한 장면이 다시 재현되고 있다. 인공지능(AI)발 '슈퍼사이클'을 맞이한 반도체 산업이 그 배경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겨냥한 '특허 괴물'의 공격이 미국 법원을 통해 이어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소송전 한복판에 놓였다. 특허 분쟁이 개별 기업의 문제를 넘어 한국 간판 산업 전반의 구조적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때리는 'NPE'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특허관리전문회사(NPE)가 제기한 소송에 휘말렸다. 지난해 11월 미국 NPE 모노리식3D가 미국 연방법원에 SK하이닉스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지난해 1월에는 중국 NPE 어드밴스트 메모리 테크놀로지(AMT)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걸었다. 미국 NPE로 분류되는 넷리스트는 지난해 9월 삼성전자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특허 침해 조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NPE는 일명 '특허 괴물' '특허 트롤'이라고 불린다. 이들 대부분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특허를 매입한 뒤 특허 침해 소송을 진행하거나 라이선스를 요구하면서 수익을 얻는다. 기업이 자사의 특허 수익을 강화하기 위해 NPE를 설립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NPE는 오래되고 모호한 특허를 매입해 공격 수단으로 활용하고, 소송이나 합의금을 위해 움직인다.
제품을 만들지 않는 NPE는 소송에서 지더라도 리스크가 거의 없으나, 소송을 당한 기업의 입장은 다르다. 특허권 침해를 인정할 경우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내야 한다. 침해를 부인하기 위해 소송을 진행하려 해도 많은 비용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NPE의 공세로 피해를 본 사례는 반도체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기업들은 디스플레이 기술과 관련해서도 NPE와 분쟁을 벌인 사례가 있다. 아일랜드 '특허 괴물' 솔라스 OLED는 2016년 설립 이후 수년간 일본과 미국, 유럽 등지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관련 특허를 집중적으로 매입했고, 이를 바탕으로 삼성디스플레이 등에 소송을 제기했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OLED 디스플레이 핵심 기술이 자사 특허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픽티바 디스플레이스, 비숍 디스플레이 테크 등 NPE들이 핵심 특허를 앞세워 수십억~수천억원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연달아 걸었다.
지식재산보호원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에서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소송 중 NPE가 제기한 소송은 전체의 80.4%에 달한다. NPE가 한국 기업에 대한 특허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NPE가 제기한 소송은 전기·전자와 관련된 소송이 대부분이다. 특히 대기업 피소 수치는 전년 대비 15건이나 늘어나며 증가 추세를 보였다.
특히 특허 소송은 장기전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LG전자는 영국 NPE인 몬디스 테크놀로지가 제기한 특허 침해 소송에서 2024년 승소했지만,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는 약 10년 걸렸다. 넷리스트는 2016~17년 SK하이닉스가 자사의 미국 반도체 기술 특허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SK하이닉스의 특허 침해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으나, 넷리스트는 2020년 소송을 재차 제기했고 5년 만에 합의했다.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소송 움직임은 거세지고 있다. 글로벌 점유율이 높고 매출 규모가 큰 기업이 NPE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 많은 배상액이 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정보 제공 기업인 유니파이드 페이턴츠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미국 연방법원에서 가장 많은 특허소송을 당한 기업은 삼성(54건)이다. 애플(51건), 아마존(35건), 구글(34건)보다도 많다.

美 보호주의 기조 따라 한국 기업 불리해져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NPE의 힘은 더 강해졌다. 트럼프 정부가 친(親)특허 정책을 펴면서 국내 기업들이 NPE와의 소송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란 예측이 현실화한 것이다. 앞서 지난해 2월 전정화 한국지식재산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포럼에서 트럼프 정부가 미국 우선주의 기조 아래 지식재산 보호를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특허 무효율이 낮아지면서 소송 대응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한국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실제로 NPE에 소송을 당한 기업들은 특허를 무효화하는 소송, 즉 특허무효심판(IPR)을 방어 수단으로 삼는다. 미국 특허청 산하의 특허심판원(PTAB)을 통해 이미 등록된 특허의 유효성에 대한 판단을 받는 것이다. 무분별한 소송을 견제하고 배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인 셈이다. 최다 피소 기업인 삼성전자는 PTAB에 특허 무효 심판을 가장 많이 제기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효 심판의 개시 요건이 강화되면서 제도 실효성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정부가 특허권을 국가 경쟁력으로 보고 특허권자를 보호하는 정책을 강조하자 미국 특허청도 같은 기조를 보이고 있다. 기업의 IPR 신청 자체를 제한하는 개정안을 추진한 것이다. 유효성이 인정된 특허에 대한 심판 자체가 어려워지면 NPE에 유리한 환경이 형성된다. 이에 삼성전자는 의견서를 통해 "개정안은 무효 가능성이 높은 부실 특허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애플도 IPR이 어려워질 경우 소송이 늘어나면서 혁신에 투자할 자금이 소송으로 소모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10월 업계에서는 특허 무효 심판 개시가 사실상 멈췄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면서 "특허가 문제가 되면 (소송을 통해) 무효화한다는 '사후 대응 논리'가 통하지 않게 됐다"는 토로도 나왔다. '특허 괴물'들의 소송 공세가 확산되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면서 연구개발·투자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공급망 전반의 불확실성도 키울 수 있다. 산업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주는 구조적 리스크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허 괴물'의 무분별한 소송 제기가 기업에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국가 차원에서 기술력을 보호하고 장기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정책과 네트워크를 가동해 한국 기업에 대한 소송을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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