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약속도 쓸려갔나" 폭우보다 더 잔인한 6개월 [하상윤의 멈칫]
특별재난지역 선포에도 복구는 '제자리걸음'
농작물재해보험은 ‘유명무실’
빚더미 안고 현장 등지는 청년농·임차농

“차라리 그때 내가 죽었어야 했나 싶은 나쁜 마음까지 듭니다. 수해 직후엔 농림부 장관도 다녀가고 대통령도 와서 다 해결해줄 것처럼 말했지만, 여전히 농민들은 생계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남은 건 현실성 하나 없는 행정 지원과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뿐이네요.”
지난 19일 경남 산청군 신안면의 청년 농부 유창윤(33)씨가 한때 딸기 하우스로 빼곡했던 공터에 서서 울분을 토했다. 지난해 7월, 나흘간 쏟아진 극한 호우는 신안면을 가로지르는 양천 제방을 터뜨리며 이 일대 농가를 집어삼켰다. 예년 같으면 한창 딸기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시기지만,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3억 원이 넘는 복구 비용과 꽉 막힌 대출 장벽이다.


6개월 만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유승현(56)씨는 인터뷰 내내 고개를 떨궜다. 그가 딸기와 애플망고를 재배하던 3,000평(약 9,900㎡) 터전이 모조리 망가졌지만, 위태로운 현실을 지탱해줄 사회적 안전망은 전무했다. 딸기농장은 보험에 가입했음에도 정식(본밭 옮겨심기) 전 모종 단계에서 유실됐다는 이유로 농작물 보상은 전혀 받지 못했고, 시설물에 대한 보상은 현실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시설 피해액 약 3억 원에, 한 해 농사를 망쳐 증발한 수익 약 3억 원까지 합치면 그가 떠안은 손실만 6억여 원에 달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이미 대출을 안고 있는 그에게 허락된 건 소액 대출뿐이었다. 유씨는 “지금 농촌 현실에서는 한 번 엎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게 불가능하다”면서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지자체가 발표한 복구 예산 규모는 역대 최고 수준이지만, 농민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산청군이 밝힌 이번 수해 복구 총사업비는 6,362억 원에 이른다. 이 중 하천과 도로, 산사태 복구 등 공공시설에 투입되는 예산은 5,678억 원으로 전체의 약 89%를 차지한다. 농경지 유실과 농작물, 농기계 등 농민 생업과 직결된 농업 분야 피해 복구에 배정된 예산은 295억 원이다. 군은 주요 농작물의 지원 단가를 실거래가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지원율을 100%로 상향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다수의 농민들은 정부가 내세운 거대한 수치와는 무관하게 여전히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땅 한 평 없는 임차농의 현실은 더 비참하다. 8년 차 귀농인 김현우(40)씨는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입해왔지만, 정작 재난 앞에서는 철저히 배제됐다. 현행법상 시설 재해 보상금이 실경작자가 아닌 시설 소유주에게 지급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7년 동안 농촌에 정착해보려 스스로를 갈아 넣었지만, 지금 손에 쥔 건 마이너스 잔고뿐”이라며 허탈해했다. 그는 “농촌에서 임차인은 법적 보호 장치가 전무한 ‘을 중의 을’이나 다름없다”며 “법에 명시된 권리가 없으니 결국 저처럼 빈손으로 쫓겨나는 것”이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김씨는 현재 신안면을 떠나 인근 생비량면에 농토를 임대해 새 삶터를 꾸리고 있다.

특수목을 재배해온 이모(67)씨에게 지난 6개월은 재난 그 자체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는 희소난치병을 앓는 아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라 생각하며 20여 년간 조경목을 ‘작품’처럼 가꿔왔다. 하지만 그 정성이 흙탕물에 쓸려간 자리에는, 위로 대신 행정 편의주의라는 2차 가해가 들이닥쳤다. 5년 전 3,000만 원에 달하는 사비를 털어 1.5m 높이로 쌓아 올린 옥토가 모두 유실됐지만, 관할 지자체는 '강바닥에서 퍼올린 자갈 흙(준설토)으로 메워주겠다'는 황당한 대책을 내놨다. 수억 원의 가치를 지닌 나무들이 사라진 대가로 받은 건, 산정 기준도 모호한 위로금 2,000만 원이 전부였다. 이씨는 “비가 많이 오면 취약한 둑의 이음부가 터질 수 있다는 게 자명했는데, 제때 보수를 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수해의 원인을 지적했다. 그는 앙상한 자갈밭으로 변해버린 농장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되물었다.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다 쓸려간 뒤에 형식적인 위로금이나 던져줄 거라면, 도대체 국가는 왜 있는 겁니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73114060004476)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산청= 하상윤 기자 jony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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