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구속되자 안성기가 한 행동은...영화 '남부군' 촬영 뒷 이야기

라제기 2026. 1. 24.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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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는 빨치산을 다룬 '남부군'(1990)을 통해 연기 이력의 전환점을 모색했다.
당신이 잘 몰랐던 배우 안성기<4>

1989년 겨울 안성기는 ‘남부군’(1990) 촬영장에 있었다. 안성기는 6·25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에 숨어있던 빨치산 남부군의 종군기자 이태를 연기했다. 이태를 비롯한 빨치산이 토벌군에 쫓기는 대목을 찍을 때였다. 정지영 감독은 이태가 계곡 얼음물에 황급히 숨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었다. 그런데 주연배우가 실제 겨울 계곡에 들어가도록 하기는 쉽지 않았다. 미리 소품으로 플라스틱 얼음을 준비해 뒀다. 정 감독은 너무 차갑지 않은 물을 부은 곳에 가짜 얼음을 띄우고 그 안에 안성기가 들어가는 방식으로 촬영할 생각이었다.

한국 영화계에 컴퓨터그래픽(CG)이라는 단어조차 쓰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플라스틱 얼음만으로 겨울 계곡 물을 실감나게 그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태가 얼음물 속으로 도피하는 장면을 찍기 전날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정 감독의 눈을 사로잡은 곳이 있었다. 얼어붙은 계곡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게 얼음이 적당히 깨진 곳이었다. 정 감독은 “저기 들어가면 딱 맞겠다”고 생각했으나 안성기에게 ‘입수’를 선뜻 제안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이 밝았다. 정 감독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안성기에게 “어제 봐둔 곳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성기는 “한 번 해보지요”라고 답했다.

안성기는 정 감독이 봐둔 곳으로 향했다.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영하의 겨울 날씨 속에서 그는 얼음 물 속으로 들어갔다. 냉기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옷 안에 비닐로 몸을 휘감았다고 하나 도움이 될리 없었다. 주연배우의 투혼 연기를 모두 숨죽여 바라보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행기가 주변 하늘을 날아갔다. 동시녹음 중인데 소음이 들어간 거다(디지털 시대라면 후반작업 과정에서 소음을 지울 수 있으나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정 감독은 미안한 표정으로 “한 번 더 연기할 수 없냐”고 물었다. 안성기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얼음 물 속으로 향했다. 촬영되고 있을 때 하필 또 비행기가 주변을 지나갔다.

안성기는 '남부군'을 촬영하며 한겨울에 얼음물에 들어가는 등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했다.

정 감독은 세 번째 연기를 도저히 부탁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조감독을 시켰다. 조감독이 재차 연기를 요청하자 안성기는 조감독을 짧게 노려본 후 얼음 물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2005년 출시된 ‘남부군’ DVD 코멘터리(정 감독과 안성기 참여)에 따르면 안성기는 ‘얼음 물 연기’ 이후 몸이 굳는 현상을 겪었고 몸을 녹이면서 30분 동안 벌벌 떨었다.

정 감독으로서는 실감나는 장면 연출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안성기의 연기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얼음 물 연기뿐만 아니었다. 안성기가 없었다면 ‘남부군’은 완성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금기 빨치산을 스크린에 호명한 ‘남부군’

'남부군'은 빨치산의 악전고투를 다양하게 담기 위해 1년에 걸쳐 촬영했다.

‘남부군’은 작가 이태(1922~1997)의 동명 수기(1988)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수기에는 서울에서 기자로 일하다 6·25 전쟁을 겪으며 얼떨결에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이태의 회고가 담겨있다. ‘남부군’은 1987년 6월 민주화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에 자유화 바람이 불면서 출간이 가능했다. ‘남부군’은 50만부가 팔렸다. 금기로 여겨지던 빨치산을 다룬 문학이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원작이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고 하나 영화화는 쉽지 않았다. 이념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도 빨치산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소재였다. 영화화 과정에서 우익단체나 정부가 방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역시나 기존 제작사는 선뜻 나서지 않았다. ‘남부군’ 제작만을 위한 회사 남프로덕션이 별도로 차려졌다. 시대극이라 제작비가 만만치 않기도 했다. 유명 배우가 나서면 제작이 좀 수월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하고 당시 톱스타 안성기 캐스팅에 나섰다. 안성기는 원작을 읽은 후 출연을 결정했다. 책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2011년, 사월의책)에 따르면 안성기는 출연 제안을 받은 후 ‘내심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진심으로 하고 싶어 했던 역이었고, 만들어져야 할 영화였기 때문’이다. 안성기는 토벌군에 쫓기는 빨치산의 피폐함을 표현하기 위해 27일 동안 머리를 감지 않는 등 몸을 던져 연기하려 했다.

정 감독은 사계절을 스크린에 담고 싶었다. 빨치산의 악전고투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1년 내내 촬영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주연배우를 영화 한 편에 1년 동안 묶어두는 건 쉽지 않았다. 정 감독은 겹치기 출연을 하지 않던 안성기라면 가능하리라 봤다.

배우 안성기(오른쪽)가 2004년 7월 14일 오후 광화문 정보통신부 앞에서 열린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영화진흥법 개정촉구 및 한미투자 협정 저지를 위한 대국민 보고대회에 참여해 인삿말을 하고 있다. 안성기는 정지영(왼쪽) 감독과 영화인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9년 초봄 시작된 촬영은 순조로웠다. 여름까지 별 문제 없이 촬영이 이뤄졌다. 가을 문턱에 들어선 9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경북 포항시 일대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한 일간지가 ‘정지영 감독 구속’을 보도했다. 정 감독이 1988년 미국 영화사(UIP) 직접 배급(직배) 반대 투쟁 당시 서울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 뱀을 투입하도록 교사했다는 혐의였다. 정 감독은 9월 2일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형사들에 연행돼 서울로 향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남부군’ 촬영은 전면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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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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