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시집이 2020년 재출간되어 유튜브를 타고 [.txt]

한겨레 2026. 1. 2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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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l 이수명 시인의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이수명(61) 시인은 1994년 가을 시 10편을 지원 조건으로 한 세계사 공모전에 70편을 응모해 신인상을 받았고 이듬해 첫 책까지 바로 낼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의 첫 책, 나의 첫 시집의 제목은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다. 1995년 9월1일 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한 지 꼭 1년 만이었고 그때 세계사에 투고한 시 70편이 모두 수록되었다. 당시 신인상 투고 요건은 시 10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르고 선별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제출한 70편은 모두 1994년 1월부터 가을 투고 전날까지 대략 9개월 동안 쓴 것이다.

1989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1월에 다시 시를 시작하기까지 5년 동안 문학을 떠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5년이 좀 더 길어도 좋았을 것 같다. 대학 내내 붙들고 있던 문학을 떠나 다른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나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다시 문학으로 복귀했다. 나는 당시를 약간 비장한 마음으로 돌아보고는 했는데, 돌아온 자들은 으레 그런 마음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돌아온 자답게 1년간 집중해서 시를 썼고, 투고했고, 연락을 받았고, 그 결과물이 첫 시집이다. 나는 이후로 다시 문학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등단하면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발표한 것들을 모아서 시집을 낸다. 내 경우는 등단을 위해 투고한 작품을 그대로 시집으로 엮었으니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에는 기발표작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뭐랄까, 습작의 냄새가 많이 난다. 시를 평생 쓰고 살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5년간 문학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감회를 비롯하여 20대 후반을 보내면서 부대껴야 했던 날것의 감정이나 소요, 치기, 방황 같은 것들이 있다. 첫 시집과 함께 나는 이런 것들을, 청춘을 밀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l 이수명 지음, 문학동네(2020, 재출간)

이후 둘째 시집부터 나의 작업은 빠르게 변화해 갔기 때문에, 그리고 8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변화는 지속되고, 무엇보다 변화의 향방을 나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현재의 작업에 집중하느라 이전 시집을 돌아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첫 시집이 등단 투고 작품들이었고, 시인으로서 본격적으로 발표한 작품들은 두번째 시집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에 수록되었기에 이것이 나의 첫 시집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나는 나의 첫 시집의 이러한 애매성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모호한 태도로 지내 왔다. 여기에는 첫 시집이냐 두번째 시집이냐의 위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한몫하기도 하였다.

세계사가 더 이상 시집을 출간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도 절판된 지 오랜 시간이 이어졌다. 젊은 시절 특유의 비장한 표정이 이제는 부담스러워진 사진을 표지로 달고 있어서인지 나는 시집의 절판이 아쉬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마음이었다. 세기말의 분위기가 지금도 돌아다니기보다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에 안도하는 이상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예 사라지지 못할 운명이었는지, 절판되었던 이 시집은 2020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처음 문학동네에서 재출간을 결정하고 연락을 주었을 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원고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오래 덮어두었던 흉터를 다시 들춰보는 기분이었다. 흉터는 익숙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낯설게도 느껴졌다. 어떤 간절함이 있는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 것이다. 하긴, 첫 시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출간하고 나면 책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써 멀찍이 내게서 물러난다. 책은 세상에 나오면 저자의 것이 아니다. 저자도 그 책의 독자의 한 사람이 될 뿐이다.

세기말의 어두운 분위기를 몰아내고 분홍색 표지로 재출간된 나의 첫 책은 그리하여 21세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출간 행사도 하고 그중 ‘구름’이라는 시를 낭송한 것이 유튜브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나는 소음 뒤에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로 끝나는 이 시는 21세기의 소음에 성공적으로 합류한 것일까.

이수명 시인

그리고 다음 책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등단 후 발표하기 시작한 시들을 처음으로 묶은 시집. 이런 이유로 두번째 시집이지만 시 세계의 출발선이자 바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주체의 자리에 사물과 세계를 세우려 감행한 고투를 찾아볼 수 있고, 이것이 이후 여정의 초석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시집을 발판 삼아 낯설게 도약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발랄한 언어 운동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시집도 1998년 세계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고 이후 재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2015, 재출간)

마치

모든 시집이 다른 운동과 속도로 움직이지만 여섯번째 시집 ‘마치’는 거리의 측면에서 매우 멀리 나아간 시집이 아닐까 생각된다. 거리뿐 아니다. 망설임 없이 자유롭게 여러 방향에서 움직인, 두드러지게 질량감 있는 시집으로 여겨진다. 다소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구현하고 싶었던 시의 동력을 지금도 ‘마치’에서 느낄 수 있다. 2024년 콜린 리마셜의 번역 ‘Just Like’로 출간되었고 지난해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받았다.

문학과지성사(2014)

물류창고

일곱번째 시집. 3부로 구성되어 있고, 1부에 ‘물류창고’라는 동일 제목의 시가 10편 들어 있다. 일련번호가 붙어있지 않아서 연작시라 하기도 어렵고, 물류창고라는 동등한 반복을 통해 보관과 축적의 기능을 담당할 뿐 생산적인 활력이 소멸해 버린 곳에서의 존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동안의 언어 운동 위에, 대상과 사물의 실제적 묘사에 많은 비중을 둔 ‘물류창고’는 앞선 6종의 시집들과 비교할 때, 가장 지상적인 시집이라 할 수 있다.

문학과지성사(2018)

횡단

두권의 시론집 가운데 첫 권에 해당된다. 여러 잡지나 단행본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2011년에 문예중앙에서 출간했다. 90년대 후반 이후 특히 2000년대의 첫 10년을 경유하면서 문학의 다양한 변화와 분기에 대해 고심하고 탐구한 것들을 정교화하고자 했다. 그것은 시란 무엇인가, 하는 다소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당대의 시들에 나타나는 다양한 징후들을 조감하고 그 위상을 가늠하여 새로운 시대의 시들을 전망해 보려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민음사(2019, 재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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