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요, 왕의 쉼터로…세종대왕 발걸음 따라 청주-증평 ‘치유의 여정’

옛날이야기로 출발해 보자. 1444년 반가운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다. “청주에 물맛이 호초(胡椒·후추)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하는데, 여러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곳에 행궁을 짓게 하고 여러 차례 찾아가 머물렀다. 지독한 안질로 글자조차 흐릿하게 보였던 성군이 드디어 치유의 샘을 찾은 것이다. 6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초수가 솟던 자리에는 ‘초정치유마을’이 들어섰다. 초정약수의 탄산 기포가 여전히 톡톡 터지는 이곳에서, 겨울의 피로를 내려놓는 여정이 시작된다.
왕이 찾은 치유의 물, 초정치유마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초정(椒井)은 ‘후추처럼 톡 쏘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이 물은 천연 탄산수다. 기포가 톡톡 터지는 초정약수는 미국 샤스터, 독일 아폴리나리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불려왔다.
초정약수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다. 한글 창제에 몰두하던 시기, 세종은 심한 눈병을 얻었고 초정의 물이 효험이 있다는 말에 이곳을 찾았다고 전한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세종이 머무른 기간은 121일에 달한다. 초정치유마을은 그 역사적 가치를 오늘로 옮겨 놓은 공간이다. 왕이 즐겼던 치유의 물을 스파 테라피라는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힐링동에 입장해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치유 준비 완료. 현장에서 래시가드 대여도 가능하기에 갑자기 떠난 여행자도 마음 놓고 입장할 수 있다.
‘세계 3대 광천수’로 스파
세종이 머문 곳에서 숙박
조선 독서왕 문학관 탐방
레저 카트 도전도 가능해
몸과 마음 데워주는 도시
이동 동선을 따라 치유 공간이 하나씩 등장한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시설은 미디어 오감 테라피다. 파도가 철썩이고, 바닷속 생물들이 유영하는 화면과 함께 자연의 소리가 마음을 채운다. 일상을 지우고 평온을 찾은 후엔 따뜻한 침대에 누워 온열 테라피를 즐긴다. 눈은 스르륵 감기고 몸의 긴장은 사르륵 풀린다. 마지막으로 버블 테라피실에서 풍성한 쌀 거품으로 전신을 마사지하고 나면 스파 입장이다.
스파 시설도 다양하다. 수압형과 이완형으로 나뉘는 널찍한 스파치유풀에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놀기 좋은 유아풀, 쉬기 좋은 선베드 그리고 체온유지실을 갖췄다. 후끈한 스파에 체온유지실이라니, 그 의아함은 개인광천욕장과 탄산와추풀에서 해소된다. 천연 탄산수의 온도가 상당히 낮아서다. 손만 넣어도 짜릿하게 차갑지만,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광천수에 몸을 담그면 피부가 뽀득뽀득하게 느껴진다.
초정치유마을은 명상 맛집이기도 하다. 하루에 세 번, 액티브-싱잉 볼-마음 챙김으로 이어지는 명상 프로그램이 열린다. 4주에 걸쳐 마음을 돌보는 명상교실도 운영 중이다. 매주 두 번 명상하러 온 김에 광천욕도 할 수 있다는 뜻인데, 한 달살이라도 해야 하나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다.
임금이 머물던 자리에서, 초정행궁

탄산수 기포에 몸과 마음이 산뜻해지니 비로소 바깥이 궁금해진다. 초정치유마을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세종대왕이 같은 물로 눈을 씻었던 자리를 향해 시간이 되감긴다. 초정행궁은 세종이 머물렀던 자리를 조성한 역사 문화공간이다.
1444년에 지어진 행궁은 1448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청주시가 2년에 걸쳐 그 모습을 재현했다. 다른 지역의 행궁을 참고해 궁궐다움을 갖추면서도 거닐기 좋게 전각을 배치했다. 입구의 공원에는 한글과 과학의 요소를 녹였다. 한글 자음의 모양을 따 벤치를 만들고, 혼천의나 측우기 등 세종 시대 과학 기기들을 실물 크기로 설치했다.
세종대왕의 업적과 애민정신은 행궁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전시관으로 꾸며진 덕분이다. 왕이 잠을 자던 침전에 들어서면 ‘세종이 꿈꾼 하늘’을 주제로 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지고, 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 문을 열면 홀로그램과 VR을 중심으로 한 천문과학관이 나오는 식이다. 초정의 이야기를 담은 초정 역사기록관, 관련 서적을 읽을 수 있는 독서당도 관람에 재미를 더한다.
그중에서도 초정원탕행각은 꼭 들러야 한다. 광천수 족욕 시설로, 행궁을 찾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볕과 바람이 잘 드는 구조에 책도 비치해 느긋함이 흐른다. 아쉬운 점은 수온이 낮은 초정약수 특성상 야외 족욕탕은 3월에서 10월까지만 운영된다는 것. 다행히 올해 1월7일, 실내 족욕 체험장도 문을 열었으니 이용해 보자. 단, 사전 예약은 필수다.
초정행궁의 또 다른 묘미는 숙박과 찻집이다. 왕이 머물렀을 자리에서 보내는 하룻밤의 특별함이란. 게다가 투숙객은 초정치유마을 이용료를 50% 할인받을 수 있다. 전통찻집에서는 보은 대추를 으깨 넣은 대추차와 이틀 동안 달여낸 수정과를 판매한다. 따끈한 차 한 잔에 온몸에 온기가 스며든다.
속도와 별빛 사이, 모토아레나와 미디어아트센터
정적인 쉼으로 치유를 했다면 이제 심장을 뛰게 하며 마음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볼까. 초정에서 차로 약 20분,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면 전혀 다른 결의 쉼이 우리를 기다린다. 도착한 곳은 벨포레 리조트. ‘아름다운 숲’이라는 이름처럼 산과 호수를 품은 복합 휴양지로 놀이동산과 썰매장, 목장 등 각기 다른 취향의 쉴 것이 모여 있다.
그중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끄는 곳은 모토아레나다. 국제자동차연맹(FIA)과 국제카트연맹(CIK-FIA)의 공식 인증을 받은 국제 카트경기장으로 다양한 종목의 레이싱이 펼쳐진다. 17개의 코너와 247m의 직선 구간을 갖춰 코스만 봐도 시원한 스릴이 전해진다.
보는 것만으로 아쉽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레저 카트에 도전해 보자. 최대 속도 60㎞로 초보 운전자도 쉽게 주행 가능하다고. 그럼에도 걱정이 앞서는 왕초보와 아이들을 위해 2인승 카트도 준비되어 있다. 스타트 라인에 서는 순간, 쿵쾅대는 심장이 먼저 앞서 달리고 이내 일상의 속도를 잊게 된다.
트랙 위에서 에너지를 쏟아냈다면 신비로운 탐험을 떠날 차례다. 우주여행을 콘셉트로 구성된 미디어아트센터는 무수한 별과 행성,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광활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몰입감에 걸음이 느려진다.
빛과 소리가 어우러진 전시실을 지나면 VR 체험, 4D 라이더, 어린이 기차 등 놀이 시설이 있는 플레이존이 나온다. 설렘 가득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공간이다. 우주와 자연, 예술과 놀이가 조화로운 이곳에서 자신만의 휴식을 즐겨보자.
만 번을 읽어 이룬 경지, 김득신 문학관

세종이 초정약수로 병을 고치며 국정을 이어갔듯, 증평에는 책으로 자신을 고쳐 나간 사람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조선 중기 시인 백곡 김득신의 정신이 깃든 독서왕 김득신 문학관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다정하게 보여준다. 문학관에 들어서기 전, 조형물에 새겨진 글귀가 마음을 크게 울린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김득신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은 뒤 이해력이 떨어져 글을 늦게 깨우쳤다. 유학의 기본 교재인 <십구사략>을 석 달 동안 읽고도 첫 구절 26자를 채 외우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을 만큼 더딘 아이였다. 모두가 그의 공부를 말릴 때, 아버지 김치만은 “분명 나중에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날리게 될 것”이라며 아들을 북돋웠다고. 김득신은 포기 대신 반복을 택했다. <사기>의 ‘백이전’은 11만3000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등은 2만번, <중용서> 등은 1만8000번을 읽었다. 그가 1만번 넘게 읽은 글만 총 서른여섯 편에 달하는데, 1만번 이상 읽은 것들만 골라 그 횟수를 ‘독수기’라는 이름의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스스로를 ‘둔재’라 불렀던 김득신은 하나의 글을 1만번씩 반복해서 읽었고, 59세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대의 으뜸가는 시인으로 꼽혔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된다. “느려도 뭐 어때, 멈추지만 않으면 괜찮아.”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청주·증평 | 글·사진 김기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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